15년간 키운 러시아에 대한 애정이었다. 러시아전문 여행작가 서진영(34)씨 얘기다.
최근 출간된 ‘이지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블라디보스토크 등 근래의 극동러시아 지역을 다룬 첫 안내서다. 극동러시아 지역 안내서를 기다린 독자들에게도 의미가 있지만, 공저자인 서씨에게도 남다른 사연이 있다. 평범한 직장인이던 그가 회사를 그만두고 앞으로 러시아를 향해 ‘직진’키로 한 의지의 첫 결과물이어서다. 지난달 25일 서울 명동에서 서씨를 만났다.
서씨는 퇴사하던 순간을 이렇게 떠올린다. 서울 명덕외국어고 러시아어과, 연세대 노어노문학과, 코트라(KOTRA·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블라디보스토크 무역관 과장, 외교부 파견 근무…. 서씨는 좋은 학교, 좋은 직장에서 소위 안정적이라고 말하는 이력을 채웠다. 선망받는 공기업에 들어간 것도 불과 대학 4학년 23살 때였다.
모범생이던 그의 마음에 불을 지른 건 직장생활 10년차에 몸을 실은 유라시아친선특급(2015년)이었다. 열차에서 만난 또래 친구들은 연극배우, 대학원생, 강사 등 누구보다 열심히 살며 삶에 대한 열정에 인생의 전환점을 마련하고 싶어 고민이 치열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는 “안정적으로 돈을 벌고, 어디 다닌다고 말할 회사도 있었지만 흘러가는 대로 살다간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모른 채 마음이 질식할 것 같았다”며 “남들이 좋은 것이라고 하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겠지만, 자기만의 의미부여와 명분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이어 “여행은 취하고 버릴 것을 구별하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걸 깨우치게 해줬다. 예전엔 원하는 게 뭔지도 모른 채 손에 쥐인 게 많을수록 좋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런 욕심이 결단을 어렵게 한다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러시아전문 여행작가 서진영씨가 지난달 25일 서울 중구 명동 을지로입구역 근처에 위치한 러시아의 세계적 대문호 푸시킨 동상 앞에서 러시아와의 인연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재문 기자 |
서씨는 러시아의 매력에 빠지게 된 이유를 묻자 “고등학교 때 너무 즐겁게 공부해서”라고 했다. 그는 “고등학교 1학년 때 러시아어를 배우기 시작해 3학년 졸업할 때까지 러시아어보다 매력적인 무엇도 찾을 수 없었다”며 “대학에서도 러시아어를 이어간 이유”라고 말했다.
고교시절 사용한 러시아어 교재는 표지에 그려진 바실리 성당의 오색 빛이 바래 흐릿해지도록 세월이 흘렀지만, 서씨는 아직 이 책을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다.
서씨는 “2004년 모스크바에 교환학생을 간 뒤부터 대도시만 9곳을 방문했다”며 “모스크바는 그간 폭발시키지 못했던 잠재력을 토해내듯 급속히 발전하고 있고 유럽과 아시아가 조화를 이룬 블라디보스토크도 상전벽해 중이면서도 거대한 땅 곳곳에 가공되지 않은 매력도 여전히 품고 있다”고 말했다. 또 “러시아에서는 웃으면 상대에게 호감이 있다는 표시이기 때문에 쓸데없이 먼저 웃지 않는데, 이걸 오해한 한국 사람들은 무섭게 받아들이기도 한다”며 “‘츤데레’(겉으로는 퉁명스러운 듯하나 보이지 않게 챙겨준다는 뜻의 은어) 문화여서 사람들을 알고 나면 정이 많고, 과잉친절은 없지만 불친절도 없는 무친절 문화도 쿨한 매력”이라며 눈빛을 반짝였다.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