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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종호 판사 "폭력게임에 중독되면 인간을 물건 취급"

“소년법 폐지는 매우 신중하게 결정해야 합니다. 단순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며, 형법, 청소년보호법 등 우리 법체계 전반과 연계가 되는 문제이지요…”

전국에서 청소년 관련 재판을 가장 오래해 청소년 전문 법관으로 정평이 난 부산가정법원 소년1단독 재판장인 천종호(사진) 부장판사는 7일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부산 여중생 집단폭행사건으로 촉발된 소년법 폐지 또는 개정과 관려, 매우 신중한 입장을 표명했다.

21년간 법관생활을 했고, 현재 8년째 소년사건을 전담으로 처리하고 있는 천 판사는 “현재 만19세로 돼 있는 미성년자 처벌규정이 18세로 내려가게 된다면 선거권도 18세로 내려가야 하는 등 전체적인 법체계와 맞물려 있는 상황이어서 소년법 개정은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천 판사는 “최근 8년간 소년사건을 다룬 경험에 비춰볼 때 청소년들이 ‘청소년 관련 처벌규정이 약하다’는 것을 알고 의도적으로 상상치 못할 극악한 범죄를 저지른다는 게 반드시 맞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현재 우리 사회가 잔인한 폭력게임 등에 무차별적으로 노출돼 있는데다 어른들의 범죄행위가 갈수록 흉포화하고 있는 점, 가정해체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청소년 인성교육이 무너지고 있는 점 등 매우 복잡한 문제점들이 얽혀있다”고 밝혔다.

천 판사는 “이번 부산 여중생 집단폭행사건만 해도 아이들이 가해사실을 스스로 공개한 것은 저로서는 상상이 안 되는 점인데, 이런 부분을 추후 수사기관과 관련 전문가들이 심도깊게 조사·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했다.

그는 특히 청와대에 청원이 제기돼 국민적 관심사로 떠오른 소년법 폐지에 대해서는 극도로 신중을 입장을 보였다.

소년법을 폐지하게 되면 형법으로 아이들 범죄를 다루게 되기 때문에 14세 미만의 경우에는 형벌을 부과할 수 없게 되고, 결국 소년법에서 다루는 소년보호처분도 할 수 없게 된다.

천 판사는 또 “소년법이 폐지되면 동시에 14세 이상의 아이들은 성인과 동등하게 형법을 적용해야 한다는 점이 생기기 때문에 단순한 폐지보다는 처벌 상한선을 좀 높인다든지 하는 방안을 강구하면서 청소년보호법이나 민법, 형법, 아동복지법을 전반적으로 재정립하는 법체계의 큰 그림을 다시 그리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천 판사는 이번 사건도 결국 폭력게임과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정규 학교생활에 적응을 못하고 부모의 관심도 받지 못한 아이들이 갈 곳은 PC방 밖에는 없고, 결국 폭력물에 노출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는 “폭력게임을 하게 되면 일방적으로 총을 쏘고 흉기로 찌르고 피 튀기는 장면을 일방적으로 보게 되는데, 그게 본인에게는 인격적으로 다가오지 않기 때문에 인격적 공감 능력을 기를 수가 없게 되는 것”이라고 밝혔다.

천 판사는 청소년 게임 중독의 심각성과 관련, 잘 알려지지 않은 충격적인 일화 한 토막을 털어놓았다.

그는 “8년전 사건으로 기억되는데 폭력게임에 중독된 10대 후반의 청소년 2명이 심야에 택시를 타고 부산에서 김해까지 이동한 뒤 시가지 외곽 으슥한 곳에서 택시기사를 흉기로 찔러 즉사시킨 사건이 있었다”며 “그 사건 기록을 검토하면서 무자비한 폭력게임의 중독성을 실감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천 판사는 “그 청소년들은 살인을 밥 먹듯이 하는 고강도 폭력게임에 중독돼 있었기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게 얼마나 큰 범죄인 지, 반사회적 반인륜적 행동인 지를 생각하는 죄의식이 전혀 없었다”며 “즉 본인의 순간적인 쾌감만을 쫓을 뿐 타인을 배려하고 생각하는 공감 능력이 전혀 없는 상태였다”고 설명했다.

천 판사는 아이들의 인격 성장과 축구를 비교 설명하기도 했다.

그는 예를 들어 22명이 함께 하는 운동인 축구의 경우 자기가 상대팀 선수로부터 심한 태클을 당해 극심한 아픔을 겪게 되면 그 이후 자신은 그 아픔을 알기 때문에 비정상적인 방식의 거친 태클을 자제하는 경향이 있고, 이게 정상적인 인성 인격이 작동하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천 판사는 “인간성 회복은 기본적으로 가족관계의 회복인데, 저녁시간 만은 밥상머리 교육이 되도록 해야되는데 다들 너무 바쁘니까 가족 간 만날 시간이 없는 게 문제”라고 덧붙였다.

천 판사는 수년 전부터 ‘가족이 무너지면 청소년 교육은 대책이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는 신념을 갖고 해체된 가정의 문제아이들을 가정처럼 돌봐주는 ‘청소년 회복센터’ 설치운동을 전국적으로 펼치고 있다.

부산·경남 12곳 등 19개소가 운영 중이다. 이 센터에는 법원에서 보조해주는 교육비 외 비용 일체를 종교단체나 개인이 부담하고 있다. 이 청소년 지원에 관한 법률이 지난해 연말 국회를 통과했으나 예산이 한 푼도 편성되지 않아 확산이 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천 판사는 “청소년 회복센터’를 운영해본 결과 범죄예방효과가 확연하게 나타나고 있다”며 “예산이 지원돼 전국적으로 잘 운영된다면 사회적 비용절감에 매우 효율적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부산=전상후 기자 sanghu60@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