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선암에 모인 계(契) 조직을 요선계(邀僊契)라 불렀다. 사진은 요선계의 표지. 강원권한국학자료센터 제공 |
요선계중수서문 |
요선계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정확한 자료는 없다. 그러나 두 차례의 화재 이후 1744년에 새로 건물을 짓고 입약(立約)을 만들었던 자료만 현재 남아있다. 요선계의 입약은 35개항으로 되어있다. 입약 내용은 첫째, 국가와 백성을 위한 근본은 오륜(五倫)으로 이것을 잘 지켜서 국가를 융성하게 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며, 가정을 안락하게 한다. 둘째,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는 부모에게 효도하며, 부부가 화목하고, 동기 간에 우애가 두터운 가정은 상을 주며, 그렇지 못한 가정은 벌을 준다. 셋째,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무시하며, 다수가 소수를 능멸하며, 가진 자가 못 가진 자를 업신여기며, 어른이 어린이를 학대하며, 젊은이가 늙은이를 무시하고, 서자가 적자를 무시하며, 천한 자가 귀한 자를 무시하는 등 비윤리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은 그 경중에 따라서 관(官)이나 마을에서 처벌한다. 넷째, 앞에서는 옳다고 하고 뒤에서는 비방하며, 다른 사람의 선을 감추고 과실만을 들추어내며, 작은 일에 논쟁을 벌이고 남을 중상모략하며, 유언비어나 조작하여 사회를 어지럽히는 자는 죄의 경중에 따라서 처벌한다. 지금 시대에 적용해도 크게 무리가 없을 정도로 구구절절 눈여겨볼 조항들이다.
조선시대 요선암(邀仙巖)에는 수많은 시인과 묵객들이 다녀갔다. 이들은 요선정(邀仙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풍류를 즐겼다. 사진 위쪽부터 요선정과 요선암. 문화재청 제공 |
관리들의 나태함과 무책임함을 경계하라는 말로 지금의 관리들도 귀담아들을 대목이다. 이 어제편액들은 원래 주천면의 정자에 걸려 있었는데, 1909년에 홍수로 정자가 떠내려가고, 편액이 일본인 수중으로 들어가자 요선계 회원들이 이를 다시 매입하여 요선정으로 옮겼다. 이 편액들은 현재 요선정과 함께 강원도지방문화재자료 제41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한편 요선계 문서 외에도 이와 관련된 호구단자와 호적대장인 ‘갑인인구성책(甲寅人口成冊)’이 남아있어 요선계 마을의 주민 구성과 생활 상태도 그려볼 수 있다.
손승철 강원대학교 교수 |
인구성책표지 |
무릉도원면의 인구성책에는 이사국이라는 인물의 호적 정보가 있고, 동일인의 호구단자가 남아 있어 두 문서의 정확도를 비교해 볼 수도 있다. 호구단자에는 호주 이사국과 그의 첫째, 둘째, 셋째, 넷째 아들 내외들과 손자들로 총 10명이 호를 구성하고 있다. 그런데 인구성책에는 호구단자와 똑같이 10명이 기재되고 추가로 손자며느리가 기재되어 모두 11명이다. 손자가 성장하여 며느리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76호 중, 단 1호의 호구단자의 사례이기는 하지만 당시 호구단자와 인구성책의 정확도를 추정할 수 있는 자료로 이 시기에도 인구센서스가 꽤나 정확히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필자는 강원지역의 고서와 고문서를 수집·정리하여 DB로 구축하는 강원권 한국학자료센터 구축을 담당하고 하고 있다. 그런데 수집한 고문서를 DB화하는 과정에서 무릉도원면에 남아 있는 요선계문서와 호구단자, 인구성책이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즉 인구성책문서는 요선계 마을에서 보존하고 있었지만, 이사국 호구단자는 지역의 다른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고문서였는데, 이것이 DB작업을 통해 한 마을에서 작성한 문서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각 지역의 자료가 DB로 구축되어 전통 시대의 살아 숨 쉬는 기록인 고문서를 보여주게 될 것이다.
영월의 무릉도원 요선계 마을에 남아 있는 기록을 보며, 한국사의 안뜰을 거닐어 본다. 그들은 함께 사는 즐거움, 나눔의 행복함을 지금의 우리들보다 훨씬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케케묵은 고문서 속에서 조상들의 지혜와 사람 냄새를 느낀다.
손승철 강원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