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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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속인 듯 현실인 듯… 아련한 심산유곡 풍경

10년째 ‘신몽유도원도’ 그리는 석철주 화백 / 바탕색 있는 캔버스에 물감 올린 뒤 물·마른 붓으로 지우는 방식 작업 / “디지털시대 표현기법도 변해야죠” / 동양적 산수, 서양화 기법으로 구현 / 수석 어우러진 신몽유도원도 선보여
16세 때부터 근대 한국화단의 거목인 청전 이상범 문하에서 그림을 배웠다. 사물의 겉모습이 아니라 본질을 꿰뚫고, 삼라만상을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며, 필요하지 않은 것은 넣지 않는다는 한국화의 정신을 익힌 것이다. 정규 미술대학에 진학한 건 20대 후반. 비교적 늦은 나이였다. 동서양 재료와 기법을 두루 섭렵하는 데 누구보다도 열정적이었다. 화단에 발을 디딘 후 재료의 특성을 파악하기 위해 수많은 실험을 마다하지 않았다. 먹과 종이, 아크릴과 캔버스 작업을 넘나들며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하며 끊임없이 진화하는 작가로 정평이 나 있다. 동양적 산수의 세계를 서양화기법으로 구현하고 있는 석철주(67) 작가의 이야기다.

“재료와 기법은 달라도 수묵화의 정신세계는 그대로 가져왔다고 생각합니다. 정신이 다른 것이 아니고, 같은 정신을 표현하는 방법이 다를 뿐이죠.”

전통적인 도제식 교육을 받은 동양화단의 마지막 세대라 할 수 있는 그는 10년째 연작 ‘신몽유도원도’를 그려오고 있다. 조선의 화가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작품으로 겹겹이 여러 산봉우리들이 안개와 구름에 휩싸여 몽롱하고 환상적인 화면을 보여준다. 초록 물결이 산과 강을 휘감은 여름 산수, 눈이 내리는 겨울 산수도 있다.

현실과 꿈이 어우러진 산수풍경을 그리고 있는 석철주 작가. 그는 “현실은 꿈을 먹고 자란다는 점에서 꿈은 어머니 같은 존재”라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서양화기법은 캔버스 위에 여러 물감을 차례로 올려 쌓는다. 하지만 석 작가는 바탕색에 다른 색의 물감을 올린 뒤 마르기 전에 지워내는 방식을 취한다. 물을 쏘는 에어건, 마른 붓을 차례로 쓰며 지워내는 과정에서 형상이 드러난다. 억지로 쌓아 만드는 형상이 아니라 저절로 우러나오는 풍광이다. 최근 들어선 캔버스 위에 젤을 이용해 망 처리까지 한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왔으니 표현기법도 변해야죠. 누구나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시대에 옛날과 똑같은 방법을 고수할 수는 없죠. 디지털의 픽셀, 즉 망과 그 사이 구멍을 통해 본 풍경을 그리려고 했습니다.”

사실 그의 몽환적 기법은 여행 중에 착상된 것이다.

“강원도 정선에 갔을 때였어요. 여름철 민박에서 잠을 자다가 아침에 방문 앞에 쳐놓은 모기장으로 바깥의 풍경을 봤어요. 진짜 아름답고 몽환적이었죠. 저의 신몽유도원도 제작 기법이 그 당시 본 모기장과 그 바깥 풍경에서 영향을 받은 것 같기도 해요.”

신몽유도원도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바탕으로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에서 제목을 따온 그의 대표작 ‘신몽유도원도’ 연작은 심산유곡의 산수풍경을 꿈속처럼 아련하게 표현해 낸다. 한국화 정신의 근간인 기(氣)와 물아일체 사상의 맥은 이어가면서 지필묵으로 대표되는 동양화의 틀을 과감히 벗어나 서양화의 대표적인 재료인 아크릴 물감을 사용해 그림을 그렸다. 현대 디지털 문화의 픽셀 구조에서 영감을 얻은 중첩된 두 개의 막이 더욱더 꿈같은 상태, 몽중몽으로 빠져들게 한다. 현실과 환상을 매개하는 꿈과 안개라는 두 개의 장치를 현대적 어법으로 발전시켜 환상적인 한국화를 탄생시켰다는 평가다.

11일부터 내달 4일까지 한남동 갤러리조은에서 열리는 전시에서는 신몽유도원도와 수석이 어우러진 신작을 선보인다. 현실을 상징하는 선명한 형태의 수석이 꿈같은 분위기를 역설적으로 부추기고 있다.

“현실이 꿈이 되고 꿈이 현실이 되는 세계지요. 인간은 시계추처럼 현실과 꿈을 오가면서 삶을 그려가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50여 년간 하루도 붓을 놓지 않았다는 석철주 작가의 손끝에선 오늘도 꿈꾸는 풍경이 꿈틀거리고 있다.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wansi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