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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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전직 중수부장의 삼십육계

“권력은 나눌수록 약해진다”고 한비자는 적고 있다. 동서고금의 사례를 봐도 권력은 두 개의 태양을 용납하지 않는다. “권력은 나눌수록 커진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선서에서 “대통령의 제왕적 권력을 최대한 나누겠다”고 했다. 그러나 권력 주변에서 곁불이라도 한 번 쬐어 본 사람은 권력을 나눠 갖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권불십년(權不十年)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주인이 바뀌면 삽십육계 줄행랑을 치는 사람들이 있다. 김영삼에 반기를 들었던 ‘철강왕’ 박태준은 김영삼 집권 뒤 3년6개월간 외국으로 방랑의 길을 떠났다. 김대중정부 시절 2002년 대선 때 ‘20만달러 수수설’을 흘리며 이회창 후보 공격에 앞장섰던 청와대 정무비서관 A씨는 15년째 국내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방통대군’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의 ‘양아들’로 불린 정용욱 전 방통위 정책보좌관은 친이명박계 국회의원들에게 돈봉투를 전달한 혐의 등으로 수사선상에 오른 뒤 해외로 출국해 지금까지 종적이 묘연하다.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해외도피사범이 2494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도피사범 명단에 조만간 한 명이 추가될 분위기다.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수사를 맡았던 이인규 전 대검 중앙수사부장이 미국으로 출국한 뒤 들어올 기미가 없다. ‘논두렁 시계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그는 국정원 적폐청산 TF의 활동이 시작될 무렵인 지난 8월 해외로 나갔다. 서울 평창동 집은 텅 비어 있다. 최고의 칼잡이 출신이 칼의 속성을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김종필 회고록에 따르면 ‘자의반 타의반’ 외유를 떠났던 ‘풍운아’ 김종필에게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고난을 다 겪고 나면 나중에 기가 막힌 향기를 발산하게 될 것이다”라고 위로했다. ‘아름다운 매화도 엄동설한 속에서 고초를 겪은 뒤에야 비로소 그윽이 향기를 사방에 풍긴다’는 뜻의 시경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이씨가 그런 심정인지는 모르겠으나 전직 대검중수부장의 처신은 아니다.

김기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