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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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월성 우물에서 발굴된 고인골의 정체는

국립경주문화재硏 학술세미나
지난 9월 경북 경주의 월성 발굴 현장에서는 4구의 인골이 공개됐다. 당시 공개된 인골들은 동궁과 월지의 동쪽 우물에서 나왔다. 우물은 통일신라시대 말기에 토기와 작은 사슴을 넣어 의례를 지낸 뒤 폐기됐는데, 그 위의 토층에서 인골이 발견된 것이다. 당시 발굴조사를 진행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측은 “우물을 무덤처럼 활용한 것인지, 인신공양 의례를 치른 것인지는 단정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9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경주에서 ‘고인골’(古人骨)을 주제로 학술세미나를 개최해 이 인골들의 의미를 살펴봤다. 이날 김현희 국립김해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우물 출토 고인골의 고고학적 의미’를 주제로 우물에서 인골이 발견됐다는 점에 주목하며 우물과 인골의 관계를 분석했다. 

김 학예연구실장은 인골에 대한 분석에 앞서 신라시대 우물의 의미를 짚었다. 그는 “신라는 통일 이후 왕경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철저한 도시 계획 속에서 이에 걸맞은 도시 건축물을 축조했다”며 “경주에 집중된 왕경민들의 식수원은 고도의 토목기술로 만든 석조우물로 관리했다”고 설명했다. 이 시기의 우물은 물을 공급하는 역할을 비롯해 신라인의 일상생활과 정신세계가 투영된 공간으로 통했다. 물을 공급받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은 서로의 정보를 공유했고, 물의 신성한 기운을 받기 위해 건국설화의 무대로도 활용했다. 

지금까지 경주 지역에서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우물은 230여기에 달한다. 김 학예연구실장은 “월성 주변의 우물에서 확인된 동물·출토품의 종류와 수량은 경주 시내의 우물들과 비교했을 때 규모가 월등하다”면서 “신라 왕경 내에서 확인되는 수많은 우물과는 다른 성격의 우물로 파악되며, 왕궁이나 국가적 차원에서의 중요한 위치를 지닌 우물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김 학예연구실장은 우물의 사용단계에서 기능적인 측면과 의례적인 측면을 모두 살펴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우물의 의례단계를 △우물 축조 당시에 이루어지는 의례 △우물 사용 시 이루어지는 의례 △우물 폐기 시 이루어지는 의례로 구분했다. 이어 “월성 주변의 우물 중 대규모의 의례가 있었다고 보이는 우물의 깊이는 7~10m 정도로 매우 깊은 편”이라며 “국가나 왕실이 축조할 때부터 아마도 의례를 염두에 두고 위치뿐만 아니라 깊이까지 고려했을지도 모른다”고 추정했다. 그러면서 “인간이 영적인 존재와의 대화 등의 수단으로서 삼은 것이 동물의 희생이고 그 정점에는 인간의 희생이 있다”면서 “이때 희생되는 동물은 인간세계의 역할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동물이어야 희생의 대가를 얻어낼 수 있다고 봤다”고 설명했다. 

인골이 출토된 우물 내부 모습.
최근 우물에서 발견된 인골 4구에 대해서는 “고려 초기 즈음에 퇴적된 것으로 추정되는 퇴적층에서 4구의 인골이 확인됐다”며 “통일신라가 멸망한 이후 철저히 폐허로서 관리하던 월성 주변의 우물에 고려시대의 사람이 확인되는 것은 신라와 관련된 사람이 죽어 우물에 매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론했다. 이어 “우물을 무덤의 일환으로 재활용했을지도 모른다”며 “중국에서 우물을 무덤으로 재활용하는 사례 등으로 비추어볼 때 이러한 추정에 무리가 없다”고 덧붙였다. 

인골 4구가 출토된 동궁과 월지 동쪽의 우물.
김 학예연구실장은 “죽음의 공간으로서 무덤이 아닌 또 다른 죽음의 공간으로 마련된 우물 속 인골의 의미는 당시 신라에서 만연했던 권력과 관념의 힘에 억눌린 결과로 봐야 할지도 모른다”며 “정확한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 또 다른 자료가 나오기를 바라지만, 그러한 마음과는 반대로 더 이상의 이런 자료가 없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고 말했다.

권구성 기자 ks@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