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이슈+] 대한민국 직장내 성폭력 실태와 해법은

최근 가구전문업체 한샘의 사건을 계기로 직장내 성폭력이 사회 문제로 떠올랐다. 한샘 사건 이후 인터넷 게시판 곳곳에 ‘나도 당했다’는 피해사례 폭로가 이어지며 ‘미투(Me too)’ 운동으로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만큼 우리 사회 직장내 성폭력이 만연해 있으며, 2차 피해가 두려워 신고하지 못한 피해자가 많다는 반증이다. 직장내 성폭력은 직장이라는 폐쇄적인 공간에서 기울어진 권력관계를 악용해 벌어진 사건이어서 2차 피해에 노출될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이다.

◆ 매년 증가하는 직장내 성희롱

19일 인권위의 ‘성희롱 시정권고 사례집(2015)’에 따르면 인권위에 접수된 직장내 성희롱 사건은 2004년 4건에서 2006년 108건을 늘고, 2010년 처음으로 200건을 넘어선 후 매년 220∼230건을 유지하고 있다. 이처럼 진정 건수가 폭증한 것은 직장내 성폭력이 갑자기 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피해사실을 숨기거나 신고를 꺼리던 피해자들이 문제제기를 하기 시작하면서 수면 위로 올라왔다고 볼 수 있다.

직장내 성폭력은 특히 기울어진 권력관계에서 비롯돼 외부에 피해사실을 알리기도 힘들고, 설사 신고하더라도 2차 피해로 이어지기 쉽다.

인권위 권고사건에서도 피해자와 가해자가 ‘직접고용 상하관계’인 경우가 67.6%로 가장 많았다. 이어 ‘교육관계’(11.2%), ‘직접고용 동료관계’(6.5%), ‘간접고용 업무관계’(3.5%) 등의 순이었다. 가해자들의 직위 역시 직속 상관이거나 업무상 접촉이 많은 ‘중간관리자’(36.5%)와 직장내 절대적 권력자인 ‘대표자’(30.0%)가 많았고 이어 ‘평직원’ 18.8%, ‘고위관리자’ 11.8% 등 순이었다.

법무법인 오현의 유혜인 변호사는 “직장 내 성추행 범죄의 경우 가해자가 직장 내 권위를 이용해 피해자 반항을 억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피해자는 자신의 커리어나 인간관계 등에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해 혼자 고민하며 정신적 고통을 받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직장이라는 폐쇄적인 공간과 수직적인 관계는 피해자들이 신고를 꺼리는 이유이자, 가해자들이 과감하게 범법행위를 저지르는 배경이기도 하다.

피해자들은 나이가 어리고 직급이 낮은 직장내 ‘약자’인 경우가 많다.

직장내 성폭력 피해자 중에는 남성도 있지만 여전히 여성이 91.8%로 압도적으로 많고, 피해자 나이는 20대가 42.9%, 30대가 31.1%로 20∼30대가 74%를 차지했다.

가해자 보다 직급이 낮고 직장내 인맥이나 입지가 좁은 피해자들은 피해사실을 알렸다가 자칫 고립되거나 최악의 경우 직장을 떠날 각오까지 한다. 최근엔 사건을 축소시키기 위해 성폭력 사건을 직원간 치정 문제로 치부하거나 피해자를 ‘꽃뱀’으로 몰아 가해자로 둔갑시키는 사례도 적지 않다.

법무법인 거산의 신중권 변호사는 “사장이 직원을 성추행한 사건을 맡았었는데, 가해자가 피해자의 동료 직원들을 통해 합의를 종용했다”며 “피해자에게는 큰 압박과 스트레스가 될수 밖에 없다”고 전했다. 

◆119, 112 캠페인으로는 역부족

기업들은 사내 성폭력 사건을 예방하기 위해 성희롱 예방 교육과 회식 문화 개선 등에 나서고 있다. 최선의 대책은 예방이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몇년 전부터 술은 1가지 종류만, 1차에서 9시에 끝내자는 의미의 ‘119’ 캠페인을 벌이고 있으며, LG디스플레이도 1가지 술로 1차만 2시간 이내 마시는 ‘112’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음주문화 개선만으로는 직장내 성폭력을 근절하기 어렵다. 성희롱이 일어난 장소를 보면 ‘사업장내’가 46.1%로 가장 많았다. 이어 ‘회식장소’ 20.5%, ‘교육장소’ 8.2%, ‘사석’ 5.6%, ‘출장지’ 3.6% 등이었다.

정부는 10인 이상 사업장을 대상으로 전 직원 대상 성희롱 예방교육 실시를 의무화했지만, 교육의무 사업장 10곳 중 3곳꼴로 교육을 하지 않고 있다. 교육을 한다 해도 대규모 인원을 한 장소에 모아놓고 형식적으로 진행하거나, 교육 강사에 대한 인증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성희롱 예방 교육시간이 보험상품을 판매하는 경우도 있다.

◆신속한 신고와 단호한 대처

직장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피해자들이 감내해야 할 어려움이 더 많지만, 전문가들은 가급적 빨리 구제기관에 피해사실을 신고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신중권 변호사는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수사시관과 사내 성폭력 관련 기관 및 국가인권원회, 지방고용노동관 등 구제기관에 신속히 신고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피해자의 신고가 빨라야 증언에도 신빙성이 높다고 보고, 각종 피해를 증명하는 증거 확보도 용이하다”고 말했다.

직장내 성폭력 사건을 ‘실수’나 심한 장난, 개인간 치정으로 치부하며 사건을 축소하려는 회사의 대응방식도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형식적인 성희롱 예방교육이나 상담에 그치지 말고 조직원들이 경각심을 가질 수 있도록 성폭력 사건에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유혜인 변호사는 “직장 내 성범죄를 회사측이 제대로 처벌하지 않으면 가해자는 보복심리를 갖거나, 승리감에 도취돼 더 노골적으로 성범죄를 저지를 가능성도 있다”며 “2차 피해를 막기 위해 1차 성범죄가 발생했을 때 단호하게 대처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수사기관이나 사내 기관에 접근금지명령이나 업무공간 분리 등을 요청해 가해자와 대면할 기회를 차단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직장내 성폭력 피해는 민사소송의 대상이 될 뿐 아니라 형법상 강제추행으로 인정될 경우 최대 10년이하의 징역 또는 1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으며, 공소시효도 10년에 이른다.

무엇보다 성폭력에 대한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인식과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성문화운동팀 박아름 활동가는 “직장내 성폭력은 피해자가 현명하게 대처한다고 해서 2차 피해를 막을 수가 없다”라며 “힘들게 문제를 제기해도 사내에서 ‘뭘 그정도 갖고 그러냐’, ‘원래 썸타는 것 아니었냐’고 치부하는 등 전반적인 인식이나 감수성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어 “피해자의 말을 믿어주지 않으면 곧바로 2차 피해로 이어진다”고 강조했다.

정필재·김수미 기자 rush@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