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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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 일구며 이웃사랑 솔솔… 마을 공동체 연결 허브로

<1> 공동체 회복하는 종로구 행촌 ‘성곽마을’
“농사짓기 싫어서 서울로 도망 왔는데, 여기서 배추 캐고 있어요.” 지난 16일 서울 종로구 행촌동 한양도성 아래 한 텃밭에서 배추를 수확하던 박순애(56·여)씨가 던진 말에 함께 작업하던 이웃 주민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박씨는 능숙한 솜씨로 배추 뿌리를 부엌칼로 뭉텅뭉텅 베어내 자루에 담았다. 그는 “조금만 속이 더 찼으면 좋았을 텐데, 갑자기 날씨가 추워져 배추를 빨리 뽑을 수밖에 없다”고 아쉬워했다. 그러자 옆에서 함께 일하던 김정민(50)씨는 “크면 큰 대로 좋고, 작으면 작은 대로 귀엽지 않으냐”며 “작은 무는 동치미 담가 먹기 딱 좋겠다”고 거들었다.


석 달 가까이 키운 배추와 무를 수확하기 위해 모인 행촌동 주민과 동주민센터 직원 19명은 약 826㎡ 규모의 노지 텃밭과 상자 텃밭에서 배추 300여포기와 무 500여개를 수확했다. 이들은 22일 수확한 배추와 무로 김장김치를 담가 경로당 2곳과 차상위계층 30가구에 전달한다. 김동수 행촌권 성곽마을 도시농업공동체 대표는 “텃밭을 가꾼 지 2년 만에 전문 농사꾼이 다 됐다”며 “텃밭을 가꾸면서 마을과 이웃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커지다 보니 다들 내 일처럼 참여한다”고 뿌듯해했다.

서울시가 도시농업 원년으로 선포한 2012년 이후 도시농업에 참여하는 인원과 이들이 가꾸는 텃밭 면적이 대폭 늘었다. 농사 체험과 여가 활동을 위해 시작된 텃밭 가꾸기는 참여자가 늘어나면서 마을 공동체를 연결하는 허브로 발전하고 있다.

도시농업은 도시에서 자투리 땅이나 옥상, 베란다 등 다양한 공간을 활용해 농작물을 경작하거나 재배하는 과정과 생산물을 활용하는 농업활동을 뜻한다. 2011년 ‘도시농업의 육성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이 제정된 뒤 60여 곳이 넘는 자치단체에서 관련 조례를 신설해 도시농업 활성화를 정책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20일 서울시에 따르면 지난달 기준 텃밭 면적은 170.5ha로 2012년 64ha에 비해 2.6배 증가했다. 참여자 수는 같은 기간 38만명에서 103만명으로 2.7배 늘었다. 늘어난 면적과 인원에 비례해 도시농업 관련 공동체도 증가 추세를 보였다. 마을기업과 공동체 텃밭, 비영리 목적의 사회적기업 성장세가 두드러졌다. 사회적기업은 2013년 1곳에서 올해 15곳으로, 마을기업은 같은 기간 5곳에서 10곳, 공동체 텃밭은 같은 기간 5곳에서 14곳으로 증가했다. 도시농업법에 따르면 텃밭 기준으로 5가구 이상이 100㎡ 이상 면적을 경작할 때 도시농업 공동체로 자치단체에 등록할 수 있다.

북쪽으로 인왕산을 끼고 있는 행촌권 성곽마을은 한양성곽 서쪽 자락 바깥에 자리 잡고 있다. 성곽 아래 수려한 경치와 역사를 품은 마을이 도시농업에 뛰어들게 된 계기는 ‘재개발’ 좌절 때문이다. 인근 무악동과 교남동은 재개발로 아파트가 들어설 동안 행촌동은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한양도성으로 인한 고도 제한 때문에 뉴타운과 같은 전면 철거 방식의 재개발이 불가능했다. 2014년 서울시의 성곽마을 재생사업 대상 지역으로 선정됐지만 재개발에서 소외됐다는 주민들의 불만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김 대표는 “‘수리해서 뭐 하냐. 헛돈 쓴다’, ‘우리도 재개발해 달라’ 등의 불만을 토로하는 분들이 많았다”며 “2015년 도시농업을 접목해 행촌동만의 도시재생을 실천하면서 부정적이던 인식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 “고 설명했다. 

행촌권 성곽마을 도시농업공동체 회원들이 지난 16일 서울 종로구 행촌동의 한 텃밭에서 가을에 씨를 뿌린 배추와 무를 수확하고 있다.
이창훈 기자
행촌권 성곽마을 도시농업공동체는 지난해 부녀회와 향우회 등 각종 직능단체에서 활동하는 주민 15명으로 시작했다. 시와 종로구 등의 지원을 받아 회의실과 육묘장, 비닐하우스 등의 시설을 갖춘 ‘행촌共(공)터 1∼3호점’이 문을 열면서 도시농업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현재는 23명의 주민이 노지 텃밭과 상자 텃밭 400여개, 벌통 50여개를 관리하며 수확물을 나누고 벌꿀 등을 판매해 얻은 수익금을 지역 주민에 기부하면서 행촌동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행촌동에서 50년 넘게 살아온 김두옥(81)씨는 “텃밭 덕분에 이웃들과 자주 어울리게 된다”며 “예전에는 동네에 별로 관심도 없고 서로 데면데면했지만 이제는 젊은 주민과 함께 어울리면서 어떻게 텃밭을 잘 가꾸고 결실을 나눌지 고민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창우 도시농업연구소장은 “도심 내 공동체 텃밭이 참여하는 주민들의 공동체 소속감을 높이는 효과를 내고 있다“며 “특히 공동체 활동이 활발할수록 취약계층을 위한 사회안전망 구축에도 도움이 되기에 작은 자투리 텃밭이나 옥상 텃밭을 지속해서 발굴해 공급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창훈 기자 corazo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