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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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씹팔년""개년…" 이런 신년인사 저만 불편한가요?

“행복한 새해가 되길 기원하는 마음으로, 제가 ‘행복하자’하면 ‘씹팔년아’하시면 되겠습니다!”

30대 직장인 A(여)씨는 얼마전 회식자리에서 직장선배의 이런 건배사를 듣고 얼굴이 일그러졌다. 새해 첫 회식이기도 하고 사람들 반응도 나쁘지 않았지만 내심 불쾌감이 울컥 치밀었다고 한다. 하지만 괜히 나섰다가 ‘예민한 사람’으로 찍힐 수도 있는 일. 그저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없었다.

A씨는 “여성비하적인 욕설을 여성 동료들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며 “물론 술자리라고 넘어갈 순 있지만 그리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라고 말했다.

무술년 새해를 맞이해 여기저기 신년행사가 한창인 가운데 언어유희와 욕설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신년인사들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여성비하의 의미를 담은 욕설과 동음이의어인 ‘십팔년’, 개의 해란 의미로 ‘개년’ 등을 쓰는 식인데 이런 표현을 쓰기에 앞서 듣는 상대방을 한 번 더 생각하는 배려가 필요하단 지적이다.

6일 트위터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포털 블로그 등에 ‘이천씹팔년’, ‘씹팔년’이란 키워드로 검색해 본 결과, 지난달 31일을 시작으로 이날까지 신년과 관련해 이런 표현을 담은 글들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이외에도 ‘개’를 비틀어 이용한 인사말이나 유머글들도 최근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 떠돌고 있다. 이런 말장난이 워낙 많다보니 ‘이런 십팔’이란 이름의 다이어리나 비슷한 욕설이 쓰인 엽서 등 관련 제품들도 등장했다.

이를 두고 젊은 세대의 재기발랄함, 유쾌한 감성이란 시선과 여성비하와 욕설에 무감각해진 사회 분위기의 반영이란 시선이 엇갈리고 있다. 이런 류의 농담을 즐기는 사람들은 “너무 지나치게 해석한 것”, “웃자고 한 말”이라고 항변하기도 한다.

과거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육십갑자상 ‘병신년(丙申年)’이었던 2016년 초에도 장애인을 비하하는 ‘병신’과 여성을 비하하는 ‘년’을 이용한 신년인사가 쏟아졌다. 당시 장애인 인권단체를 중심으로 ‘병신년 농담 안 하기’ 등 자제 캠페인이 벌어졌지만, 2016년 말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정국과 맞물려 ‘아듀 병신년’, ‘병신년은 가라’ 등의 패러디가 양산되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유머로 포장한다고 하더라도 욕설은 욕설. 듣는 사람에 따라선 충분히 불쾌감을 느낄 수 있다. 사실 이런 말을 듣고 기분이 나빠도 분위기를 망치기 싫어 웃음으로 넘기는 여성들이 적지 않다. 듣는 상대방이 별 말 없다고 해서 ‘해도 괜찮은 것’이란 생각은 금물이란 얘기다. 더구나 여성에 대한 혐오가 사회적 문제로 부상하는 등 최근의 분위기 상 불필요한 오해를 살 수 있는 만큼 자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단 지적이다.

20대 직장인 김모씨는 “이런 류의 농담은 말하는 당사자만 재밌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다른 좋은 인사말들도 많은 만큼 굳이 ‘무리수’를 던져 서로 얼굴 붉히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창수 기자 winteroc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