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부터 67년이 흘러 2015년 대법원은 매년 9월13일을 ‘대한민국 법원의 날’로 정해 기념하기로 했다. “가인의 대법원장 취임으로 명실상부한 사법주권 행사가 가능해진 것을 기리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임기가 2년가량 남은 양승태 당시 대법원장이 법원의 날 제정을 밀어붙였다.
법원 안팎에선 반론도 나왔다. 이미 ‘법의 날’(4월25일)이 있는데 굳이 법원의 날이 또 필요한지 의문을 제기했다. 어떤 이들은 전형적인 전시행정으로 치부하며 “양 대법원장의 치적 쌓기용”이라고 성토했다.
제정 당시 우려한 것처럼 법원의 날은 아직 뿌리를 못 내렸다. 국민 다수가 ‘그런 날도 있나’ 할 정도다. 2015년은 첫 기념식인 만큼 외부인사들까지 초청해 한껏 성대하게 치렀다. 하지만 2016년은 정운호 전 네이처리퍼블릭 대표한테 뇌물을 받은 현직 부장판사 구속의 여파로 행사가 크게 위축됐다. 지난해 3회 법원의 날도 대법원장 교체기와 겹쳐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문재인정부 들어 ‘코드 사법부’ 논란 속에 임명된 김명수 대법원장이 최근 취임 100일을 넘겼다. 요즘 판사들 사이에선 ‘양승태 적폐’라는 표현이 공공연히 나돌고 있다. 이명박·박근혜정권 9년을 대상으로 한 행정부의 적폐청산 작업을 모델 삼아 사법부 역시 전임 대법원장 임기 동안의 적폐를 청산해야 한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이러다가 양 전 대법원장이 주도해 만든 법원의 날도 적폐 딱지가 붙을지 모르겠다.
법원의 날 제정 과정에서 사법부 구성원과 시민들의 의견 수렴이 부족했다면 반성할 일이다. 그렇다고 전임 대법원장 시절의 적폐 가운데 하나로까지 규정해 폄훼하는 건 지나치다는 생각이다. 지난 3년간 법원의 날이 사회적 이목을 끌지 못했다고 사법주권 회복의 의미가 퇴색하는 건 아니어서다. 빈곤과 전쟁, 독재의 척박한 토양 위에 입헌주의와 법치주의의 초석을 놓은 가인의 업적을 되새기는 것도 꼭 필요하다.
법조계 신망이 두터운 한승헌 변호사가 2015년 법원의 날 제정에 즈음해 쓴 언론 기고문에 답이 있다.
한 변호사는 가인의 공로를 칭송한 뒤 “이 새로운 기념일이 이 나라의 법원(또는 법관들)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고 올바른 사법의 소임 수행을 다짐하며 주권자인 국민의 뜻에 귀를 기울이는 기회가 돼야 한다”고 당부했다. 한마디로 떠들썩한 잔칫날이 아니라 판사들이 사법부의 지난 과오를 성찰하고 좋은 재판의 각오를 다지는 날이어야 한다는 충고다.
법관들이 마음을 열고 시민사회와 소통하는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는 바람도 담겨 있다. 마침 김 대법원장은 춘천지방법원장 시절인 2016년 제2회 법원의 날을 맞아 지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법원 구성원이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겠다”고 밝혔다.
김태훈 사회부 차장 |
가인의 대응은 침착하고 단호했다. “판사가 내린 판결은 대법원장인 나도 이래라저래라 말할 수 없다. 무죄 판결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면 절차를 밟아 상소하면 되지 않는가.” 70년 전 작고 약한 신생 공화국의 첫 사법부 수장에 올라 목숨 걸고 재판 독립을 지켜낸 가인의 이 추상같은 외침에 김 대법원장과 전국 모든 법관들이 제대로 응답하는 한 해가 되길 바란다.
김태훈 사회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