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로 선정되고 필라델피아미술관(2003년) 시애틀미술관(2005년) 등에서 개인전을 가진 윤광조 작가가 산동시리즈 작품 뒤에 섰다. 그의 작품은 서양형식주의 미술의 반성기류 속에서 몸이 만들어내는 즉자적인 감동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
지난주 토요일 전시장에서 만난 윤 작가의 눈가가 떨리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그들 모두 그 누구와도 닮지 않은 독자적인 자기 작품세계를 갖고 매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들과 함께 세월의 흔적을, 지금의 모습을 한자리에 모아 보는 것도 의의가 있다는 생각에서 이번 전시를 갖게 됐습니다.”
가나문화재단이 주관하는 이번 전시의 제목은 ‘급월당 줄기 현대한국 분청전-이제 모두 얼음이네’다. 가나문화재단 김형국 이사장이 지었다. 각자의 길에서 30여년을 버텨 이제 모두 물에서 얼음이 됐다는 뜻을 담고 있다. 사제에서 도반이 됐다는 얘기다.
윤 작가는 고려청자, 조선백자만 자기로 알고 지내던 어느 날 일본책을 보고 분청이 우리나라 도자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면서 가슴이 벅찼다.
“육군사관학교박물관 연락병으로 군복무를 하면서 국립박물관 최순우 선생(당시 미술과장)을 자주 뵙게 됐습니다. 분청에 대해 이런저런 것들을 물으면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지요. 제가 너무 현대적이라고 했더니 앞으로 분청을 공부하라고 권했습니다.” 그의 ‘분청 인생’이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분청은 고려청자가 쇠퇴하고 조선백자가 틀을 잡기 전의 시기를 감당했던 자기다. 왕실 귀족과 사대부들의 권력 공백기의 틈새가 창조의 온상이 됐다. 순도 높은 양식성보다는 자유분방한 예술성이 강했다. 청자 흙에 백토(화장토)를 분장하듯 발라 분청이라 이름이 붙여졌다.
“사정 얘기를 하니 스님은 ‘배운 사람들은 머리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며 그래서는 안 된다고 절을 한 번 해보라고 하셨어요. 하루 3000배를 열흘 하면 뭔가 풀릴 수 있을 거라 했지요.”
그는 처음엔 선뜻 이해가 안 됐다. 조곤조곤 얘기를 해주지 왜 절을 하게 하나 했다.
“열흘간 하루 3000배는 죽음에 이르는 길이었습니다. 스님은 냉기가 도는 법당에서 5000배를 이틀간 더하게 했습니다. 4만배가 끝날 무렵 제가 물레를 안 돌리면 된다는 답이 주어졌어요. 고정관념을 깨는 깨달음이었어요.” 어떤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망상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의 명실상부한 현대분청작품들이 탄생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저는 10년에 한 번은 주제를 바꿔 왔습니다. 작업도 그렇고 주제 접근 자세도 나태해지는 것을 저 스스로 경계하기 위해서입니다.”
전시장에 출품된 작품 중에 최근작인 산동(山動)시리즈가 눈길을 끈다. 산의 형상을 입체적으로 심플하게 형상화한 작품이다. 윤 작가는 24년 전 경주 안강으로 작업실을 옮겼다. 아침에 창을 열면 제일 먼저 그를 맞이해 준 것은 도덕산이었다. “어느 날 도덕산 영감님이 저한테 걸어왔어요. 산이 다가오는 전율을 담아낸 것이 산동시리즈입니다.”
그는 언제부턴가 화장토 위에 그림마저도 그려 넣지 않았다. 재료 성질 자체만으로 표현하고 싶어서다. 이전엔 물성 위에 자신의 얘기만 한 꼴이었다고 했다.
“재료가 갖고 있는 물성하고 대화를 나누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면 제가 흙이 되지요.”
30여년 만에 사제관계에서 도반관계로 함께 전시를 연 ‘5총사’. 오른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김문호, 윤광조, 김상기, 변승훈, 이형석 작가. |
“분청의 매력은 자연스러움에 있고 형태나 규격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스러움에 있습니다. 각자 자기 스타일을 갖게 해주는 미덕이 있지요.”
그의 제자들 작품도 나름의 제각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스승의 아류가 아님을 전시는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스승을 넘어서고 있는지도 모른다. 윤 작가는 그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작품이란 한 인간의 ‘고뇌하는 순수’와 ‘노동의 땀’이 독자적인 조형언어로 표현되어 여러 사람과 공감대를 만들어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작품은 깜짝 놀라게 하는 아이디어나 지식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순수와 고독과 열정이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생전에 최순우 선생은 통인가게 주인 김완규에게 좋은 도자기가 있으면 꼭 윤광조에 보여주라고 할 정도로 애정을 쏟았다. 오죽했으면 고유섭 선생의 아호인 급월당을 그에게 전해주었을까. 우물에 비친 보름달은 무슨 짓으로도 떠낼 수 없다는 고사대로 지고지선의 경지를 향해 성심으로 정진하라는 채찍이었다.
윤 작가는 볏짚은 화장토에 담갔다가 작품에 붙여 굽기도 했다. 삼베도 같은 방식으로 했다. 볏짚과 삼베의 흔적들이 작품에 새겨졌다.
“허상들이지요. 인생이 그런 겁니다.”
허허로운 그의 말 한마디가 법어처럼 전시장을 울렸다.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wansi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