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메리티지 와인의 창시자 죠셉 펠프스 인시그니아
보르도 스타일과 나파밸리 최상급 포도로 탄생한 명품 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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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셉 펠프스 인시그니아 2000 |
하얗게 눈이 내린 고택의 이른 아침 뒷뜰. 100개는 족히 넘을 듯한 항아리들은 저마다 고운 자태를 뽐내며 순백의 눈 지붕을 이고 켜켜히 묵은 세월을 버티고 있다. 예순을 넘긴 된 종가의 며느리는 아침 준비에 바쁜지 종종 걸음으로 나오고. 미소를 머금은 채 사랑스런 눈으로 그들을 둘러보며 내뱉는다 “오늘은 너다”. 가장 커다란 독의 뚜껑을 살짝 밀어 넘기는 순간, 사랑채까지 풍겨오는 진득하고 달큰한 이것은 뭐지. 검은 과일 맛도 나고 연필심에 담배향까지 묻어난다. 아! 300년 넘게 며느리에서 또 며느리로 이어진 장맛의 향연. ‘씨간장’.
짙은 와인을 볼륨있는 와인 글라스에 따르자 마자 마치 숲속에서 잘 숙성된 씨간장 장독 뚜껑을 열어놓은 것처럼 철분 토양의 미네랄이 후각을 인정사정없이 자극합니다. 미국 메리티지(Meritage) 와인의 창시자 죠셉 펠프스(Joseph Phelps)가 빚는 인시그니아(Insignia) 2000 빈티지는 그야말로 장맛 같은 와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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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셉 펠프스 포도밭 전경. 출처=조셉 펠프스 홈페이지 |
미국은 신대륙 와인시장을 이끌지만 역사는 매우 짧습니다. 미국을 대표하는 하이츠셀러(Heitz Cellar), 몬다비(Mondavi), 스텍스립(Stag's Leap) 등의 와이너리가 1960∼1970년대 와인을 빚기 시작했을 정도죠. 이런 짧은 기간에도 뛰어난 와인을 생산하는 배경은 천혜의 기후때문이랍니다. 유럽은 포도의 당도가 어느 선까지 올라가면 휴면기에 들어가면서 더 이상 당도가 잘 높아지 않는 답니다. 더구나 프랑스 보르도는 언제 비가 올지 몰라 포도가 끝까지 익을때까지 기다리기 어렵죠. 만약 수확기를 앞두고 비가 쏟아지면 포도는 수분을 머금으며 응축미가 떨어져 한해 농사를 다 망치고 맙니다. 하지만 미국 대표 산지 나파밸리는 포도가 충분히 익을때까지 기다렸다 늦게 수확해도 될 정도로 기후가 건조합니다. 그렇다면 늦수확한 포도는 어떤 점이 좋을까요. 바로 보르도보다 탄닌은 강렬하지만 부드럽고, 풍성한 풍미, 높은 알코올의 풀바디를 갖춘 와인을 빚을 수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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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셉 펠프스 인시그니아 |
양조할때 투자를 아끼지는 않는 점도 미국 와인의 품질을 단기간에 끌어올린 요소입니다. 최고급 피노 누아가 생산되는 프랑스 부르고뉴에서는 발효때부터 오크통을 사용합니다. 오크통 발효를 하면 과일 풍미와 오크풍미가 처음부터 잘 융합돼 와인은 밸런스가 좋고 훨씬 더 부드러운 풍미를 지니게 됩니다. 하지만 프랑스산 오크통은 미국산 보다 가격이 3배여서 오크통 발효를 하면 생산비가 많이 듭니다. 따라서 프랑스에서도 부르고뉴를 제외하면 오크통 발효를 거의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재력을 갖춘 나파밸리의 생산자들이 프랑스 오크통으로 발효하면서 고품질의 와인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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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크롭을 심은 죠셉 펠프스 포도밭 풍경. 출처=홈페이지 |
유럽은 포도나무를 빽빽하게 심어 뿌리가 영양분을 찾아 깊게 내려가도록 서로 경쟁을 붙입니다. 하지만 나파밸리는 워낙 토양이 비옥하고 날씨도 좋아 빽빽하게 심어도 경쟁이 잘 안된답니다. 따라서 포도나무를 듬성듬성 심어요. 유럽은 1ha당 1만개이지만 나파밸리 등은 1000∼1500개에 불과할정도로 듬성듬성 식재합니다. 대신 포도밭에 커버 크롭(Cover Crop)이라 부르는 다른 작물을 같이 심어서 표면의 영양분은 이런 식물이 먹게 만들죠. 이렇게하면 포도나무는 깊게 뿌리를 뻗어나가 다양한 토양의 특성을 흡수합니다. 이런 기후에서 가장 극적인 효과를 보여주는 품종이 카베르네 소비뇽입니다. 이 품종은 어디서나 잘 자라 나파밸리의 와인의 품질을 끌어 올리는 대표주자가됐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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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셉 펠프스 출처=홈페이지 |
이런 나파밸리 최고급 카베르네 소비뇽을 대표하는 생산자가 미국 매리티지 와인의 대명사 죠셉 펠프스로 대표 와인이 인시그니아입니다. 건축업자이던 죠셉 펠프스 1973년 설립한 와이너리로 3대째 와인을 빚고 있습니다. 메리티지는 메리트(Merit)와 헤리티지(Heritage)의 합성어로 구대륙 와인을 대표하는 보르도 와인 스타일의 장점과 이상적인 기후속에서 자라는 나파밸리 최상급 포도를 결합해 만든 새로운 유형의 와인을 뜻합니다. 보르도 그랑크뤼 와인을 능가한다는 뜻도 은연 담겨있죠. 메리티지 와인은 보르도에 주로 사용하는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카베르네 프랑, 쁘띠 베르도 등으로 만들며 한 품종이 90%가 넘지 않고 한해 생산량은 24만병이하로 제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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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셉 펠프스 와이너리 출처=홈페이지 |
인시그니아는 1974년이 첫 빈티지로 4년 뒤인 1978년 시장에 처음으로 소개됩니다. 당시 나파밸리는 단일 품종으로 양조해 생산자 이름과 품종명을 표기해 출시하는 버라이어탈 와인(Varietal Wine)이 대세이던 시절입니다. 품종명을 표기하려면 한 품종이 75%가 넘어야 합니다. 인시그니아 1974 빈티지는 카베르네 소비뇽 94%, 메를로 6%로 단일 품종 이름을 붙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죠셉 펠프스는 보르도 블렌딩 스타일로 만든 이 와인이 단순히 품종이름으로 불리기를 거부합니다. 이에 죠셉 펠프스는 품종 이름을 적지않고 혁신적인 발상으로 인시그니아라는 나파밸리의 최초의 브랜드를 탄생시킵니다. 상호등록이 가능한 최초의 독창적인 와인이 시장에 선보인 것이죠. 이는 나파밸리에 와인업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1980년대 오퍼스원, 로코야(Lokoya), 도미누스(Dominus), 할란(Harlan) 등이 줄을 잇게 됩니다.
인시그니아 2002년 빈티지는 와인스펙테이터(Wine Spectator) 100대 와인 1위에 오르며 올해의 와인을 차지해 명성을 날리게 됩니다. 또 1990년부터 2012년까 23개의 빈티지가 와인 스펙테이터에서 평균 90점 이상을 받을 정도로 일관된 품질을 유지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로버트 파커는 1991, 1997, 2002 빈티지에 100점을 주기도 했습니다. 미국 최고급 와인을 표방하는 컬트와인들은 생산량이 극히 적어 일반인에게 ‘그림의 떡’입니다. 하지만 인시그니아는 한해 평균 생산량은 12만병으로 프랑스 보르도 5대 샤토와 비슷한 수준입니다. 오퍼스원은 20만병대 중반~30만병을 생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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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시그니아 와인을 소개하는 나라셀라 신성호 이사(왼쪽)와 오지선 브랜드 매니저 |
인시그니아의 블렌딩 비율은 매년 조금씩 달라지지만 카베르네 소비뇽 70% 이상에 메를로, 쁘띠 베르도, 카베르네 프랑 등 전형적인 보르도 블렌딩으로 만듭니다. 1975년은 카베르네 소비뇽은 이례적으로 14%에 불과했고 50%, 60%를 사용한 해도 많습니다. 하지만 1995년부터는 적어도 70%로 비중을 늘렸고 카베르네 프랑의 비중을 줄이면서 쁘띠 베르도를 늘렸습니다. 쁘디 베르도는 조금만 사용해도 와인이 확 바뀌기때문에 보통 5% 이상이면 의미있게 쓰는 것으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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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시그니아 2013 |
최근 인시그니아를 수입하는 나라셀라에서 2013, 2009, 2000년 빈티지를 테이스팅하는 행사가 열렸습니다. 2013 빈티지는 카베르네 소비뇽 88%, 쁘띠 베르도 5%, 메를로 3%, 말백 3%, 카버네 프랑 1% 섞어 24개월간 새 프렌치 오크에서 숙성했습니다. 더블 디캔팅을 6차례나 했는데도 열리지가 않을 정도로 아직 단단합니다. 과일 풍미 정도만 보여줄 정도입니다. 하지만 잠재력은 매우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는 빈티지라는 군요. 2013년은 가뭄으로 포도는 응축된 풍미를 보였고 산도, 탄닌 많이 포함된 포도가 생산돼 발효할때 시간이 많이 걸렸답니다. 따라서 장기숙성 능력이 굉장히 뛰어난 빈티지로 평가 받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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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시그니아 2009 |
2009년은 아주 이상적인 기후를 보인 해입니다. 지나치게 습하지도 않고 수확기가 되기전에 날씨가 좋아 포도가 완숙되며 전체적으로 강건한 와인이 탄생했습니다. 2009는 카베르네 소비뇽 83%, 쁘띠 베르도 13%, 말백 4%를 블렌딩 했는데 아직 전체적으로 영한 느낌을 주지만 말린 과일과 다크 쵸콜릿 풍미가 여운을 길게 주도하며 굉장히 싸하게 넓게 퍼지는 느낌입니다. 신선하고 단단한 느낌을 주는 블루 베리, 블랙 베리, 말린 허브, 시가 박스 풍미와 탄닌이 풍부하면서 매끄러운 질감이 돋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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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시그니아 2000 |
2000년은 습한 해여서 1998과 더불어 나파밸리에서 와인을 만들기 쉽지 않은 해였습니다. 완숙한 카베르네 소비뇽을 얻기 힘들었기때문이죠. 하지만 생산자의 노력으로 2000 빈티지는 진정한 그레이트 와인으로 탄생했답니다. 카베르네 소비뇽 77%, 메를로 18%, 쁘띠 베르도 3%, 말벡 1%, 카버네 프랑 1%를 섞었습니다. 잔에 따르자 마자 마치 완숙된 블랙체리, 검은 자두의 과실향과 시나몬, 타바코, 모카, 흑연 등 깊이 있는 풍미들로 비강속까지 날아듭니다. 인시그니아는 보통 40년정도 장기숙성이 가능한데 1977년 빈티지도 아직 잘 살아있을 정도라네요. 2013 50년도는 충분히 숙성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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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셉 펠프스 소노마 코스트 포도밭. 출처=홈페이지 |
죠셉 펠프스는 인시그니아가 최고의 인기를 달리던 1999년 캘리포니아 북부 해안가 소노마 코스트(Sonoma Coast)에 새 포도밭을 조성합니다.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는 소비자들의 입맛을 사로잡으려면 무엇이가 새로운 와인이 필요했기 때문이죠. 이곳은 기후가 서늘해 피노 누아와 샤도네이 품종을 생산하기에는 최적의 환경을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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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셉 펠프스 프리스톤 피노 누아 소노마 코스트 |
죠셉 펠프스는 이 곳에서 2005년 프리스톤 피노 누아 소노마 코스트(Freestone Pinot Noir Sonoma Coast)를 선보입니다. 2014 빈티지는 과일 느낌이 아주 이상적으로 잘 유지되고 토양의 미네랄도 잘 발현됩니다. 부르고뉴 피노누아보다 검은 체리 향의 강도 강한데 샹볼 뮤지니 같은 느낌을 줍니다.
프리스톤 샤도네이 소노마 코스트(Freestone Chardonnay Sonoma Coast)2015는 감귤류 향 과 빵의 풍미, 브리오슈, 전혀 달지않는 호박엿의 풍만한 풍미가 매력입니다. 잘익은 과일의 느낌이지만 산도는 피니시까지 치고 나올 정도로 생동감이 있습니다. 고급 샤도네이를 만들때 처럼 포도 송이째 압착하는 서서히 압착 양질의 즙을 얻어 냅니다. 오크숙성과 앙금숙성을 한 클래식한 부르고뉴 스타일 샤도네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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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셉 펠프스 카베르네 소비뇽 나파밸리 |
죠셉 펠프스 카베르네 소비뇽 나파밸리(Joseph Phelps Cabernet Sauvignon Napa Valley) 2014는 ‘베이비 인시그니아’로 불리는데 그랑크뤼 4, 5등급 수준 와인으로 평가받습니다.
2014년 포도재배에 이상적인 기후로 신선한 산도와 차밍한 탄닌, 검은 체리와 검은 자두 등의 과일향, 꽃향과 미네랄 잘 감지됩니다. 영한데도 영한 느낌을 받지 못할 정도로 밀도감이 놓고 풍성한 풍미가 매력입니다.
최현태 기자 htchoi@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