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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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미의영화산책] 시간으로 상처를 견디는 법

제천 화재 참사, 밀양 세종병원 화재 등 많은 인명 피해로 이어진 화재가 빈번하게 발생해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다. 크고 작은 화재 뉴스에서 화재를 키워 인명 피해가 난 이유에는 스프링클러 작동이 제대로 되지 않았거나, 화재 대피통로가 물건으로 막혀 있었거나, 움직일 수 없게 손이 묶여 있었던 환자 상태 등 어이없는 원인이 보도돼 마음을 답답하게 한다. 그런데 한편으로 우리는 화재로 가족을 상실한 채 평생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에 대해서는 크게 주목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감독 케네스 로너건)는 자식을 화재로 잃은 그 일이 자신의 실수로 인해 발생했다는 죄책감을 평생 안고 살아가는 남자 리(케이시 애플렉)를 그린다. 2017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과 각본상을 수상한 이 영화는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차오르는 아픔의 깊이에 끝내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 보스턴 근교 맨체스터 바이 더 씨의 바다 정경은 우리를 힐링시키기 충분하며, 가슴 끝까지 파고드는 OST(오리지널 사운드트랙) 알비노니의 ‘현과 오르간을 위한 아다지오’는 예민한 감성을 자극한다.

리의 실수로 아이 셋을 모두 잃은 충격으로 아내 랜디(미셸 윌리엄스)마저 떠나버리자, 리는 형 조(카일 챈들러)와 함께 살며 조카와도 친하게 지낸다. 보스턴에서 아파트 관리인으로 허드렛일을 하며 살아가던 리는 영화 중반까지는 아무 감정이 없는 냉정한 사람으로 비친다. 그는 인간관계에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이 돼 버린 것이다. 형의 죽음으로 조카 패트릭(루카스 헤지스)의 후견인이 돼야 했지만, 그는 조카를 다른 사람에게 입양시키려 한다. 자식을 죽인 부모라는 트라우마가 선뜻 다시 부모 역할을 맡을 용기를 내지 못하게 한다. 술에 취해 벽난로 장작에 불을 붙인 뒤, 벽난로 안전망을 치지 않고 마트를 다녀왔던 그날 밤의 화재는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문득문득 두드린다.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우골리노는 정치적 이유로 탑 꼭대기에서 자식과 굶어죽는 형벌을 받게 된 후, 먼저 굶어죽은 자식을 잡아먹고 괴로워하며 지옥에 가게 된다. 지옥과 연옥과 천국을 모두 그린 ‘신곡’에서 단테가 결국 강조한 것은 지옥에 가는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말자는 것이다. 살이 찢기는 듯한 아픔을 지닌 리가 이를 극복하는 방식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견디면서 긍정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황영미 숙명여대 교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