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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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경비원의 세배 받을 권리를 보장하라”

“곧 용역업체가 바뀌고 나면 3교대 근무가 2교대로 바뀐대요. 직접 얘기해주는 건 없으니 확실한 건 없어요. 정해진 것도 없고…. 아마 따라야겠지요. 이 나이에 체력적으로는 엄청 힘들어지겠지만 20일 근무할 게 15일로 줄고 전반적으로 일하는 시간이 늘어 돈은 더 받으니까.”

지난해 서울 영등포구에 새로 생긴 한 아파트단지에서 경비원으로 일하는 A(68)씨는 설 연휴를 앞두고 한숨이 가득하다. 아파트에 입주자대표회의가 구성되면서 경비원들에 대한 용역업체를 새로 구한다는 공고를 냈기 때문이다.

올해 인상된 최저임금 때문에 정부가 지원하는 일자리안정자금 한도액에 임금을 맞추겠다고 휴게시간을 늘리는 등 한바탕 소동이 지나갔지만 용역업체 계약은 다른 문제다. 고용계약을 연장할 수 있을지, 얼마나 지속할지 등 고용 자체에 대한 전반적인 사항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 아파트 단지에서 일하는 경비원 노동자는 총 50여명으로 대부분은 미화팀과 관리팀이고 경비팀은 10명도 되지 않는다. 팀별로 용역업체는 모두 다르고, 계약기간도 1∼3년으로 제각각이다.

A씨는 “전부 퇴직자들이라 별다른 말도 하지 못하고 상시로 교대업무하면서 지내는 것 같다”며 “주말에도 마찬가진데 설 명절이라고 뭐가 달라지겠나”라고 말했다.

◆경비원에게 세배 받을 권리를

최근 ‘압구정 현대아파트’ 등을 통해 아파트 경비 노동자에 대한 이슈가 확산하고 있다.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일자리안정자금의 지원 대상에도 포함되면서 정부는 물론 국민적 관심이 커진 셈이다. 새해가 한 달이 지나며 해고에 대한 우려는 잦아든 듯 보이지만 이들이 노동계약과 관련한 이슈에서 사각지대라는 점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서울지역 아파트 경비 노동자 고용안정·처우 개선 추진위원회’는 6일 서울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번 설 명절 연휴에 경비노동자에게도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최소한을 시간을 배려하자”고 촉구했다. 위원회 소속의 민주노총 서울본부 박문순 조직국장은 “최근 경비원들에 대한 처우 개선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일부 아파트 단지에서는 설 명절 하루라도 경비원들이 세배받고 차례 지낸 뒤 오후에 출근하도록 배려하는 곳이 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못하다”며 “이들이 민족 최대 명절인 설에 세배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은 최소한의 인간적 배려이자 상생의 방식”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민주노총 서울본부와 참여연대,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등 여러 사회단체는 물론 현직 경비노동자까지 한 자리에 모였다. 기자회견에 이어 현직 경비노동자들을 초청해 세배를 받는 퍼포먼스도 이어졌다.

◆경비노동은 법·제도의 사각지대

경비노동자에 대한 처우개선의 목소리가 높아지지만 현실적으로는 뾰족한 수가 없다. 가장 큰 이유는 법적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민간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최근 서울 압구정 현대아파트 경비원들이 고용 방식을 직접고용에서 간접고용으로 전환하려는 아파트의 결정을 중단해달라고 법원에 가처분신청을 냈지만 각하 결정이 내려진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아파트 입주자들의 내부 의사 결정사항을 입주자도 아닌 경비원과 다툴 사항이 아니라는 것이 주된 판단의 요지였다.

정부가 공동주택 및 아파트 관리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내려보내고,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조례를 제정해 변화를 유도하지만 제대로 약발이 먹히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가 내린 결정에 대해 개입하거나 강제할만한 틈이 사실상 없는 셈이다.

경비원들이 대부분 퇴직자라는 점도 법적 사각지대를 키우고 있다. 아무리 한 아파트 단지에서 수십년간 같은 일을 반복하더라도 이들이 정규직이나 무기계약직 신분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현행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과 ‘고용상 연령차별금지 및 고령자고용촉진에 관한 법률’ 등에 따르면 무기계약 전환 등의 의무가 적용되는 노동자의 연령 기준이 55세이기 때문이다.

해결의 실마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의 김수영 변호사는 “지자체별 공동주택 활성화 조례 등에 공동체 활성화와 같은 각종 지원을 할 수 있는 근거가 이미 마련돼 있지만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경비원에게도 최저임금 제대로 적용될까

정부는 경비노동자를 내부 지침에 의해 ‘감시 또는 단속적으로 근로에 종사하는 자’로 분류하고 있다. 경비노동에는 환경미화, 일반 관리 등의 비중도 크지만 정부 해석은 일단 그렇다. 이로 인해 근로기준법에 따라 경비노동자(감시·단속 관련 노동자)는 근로시간과 휴일 등의 적용에 대해서도 예외 대상으로 분류된다.

올해 대표적인 이슈인 최저임금 또한 경비노동자에게 제대로 적용이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최저임금법에서도 감시·단속 관련 노동자에 대한 적용을 예외로 뒀기 때문이다. 경비노동자에 대한 처우문제가 불거지며 정부는 2007년부터 최저임금을 적용하도록 했지만 당시에는 최저임금의 70% 선에 그쳤다. 이후 경비노동자에 대해 최저임금이 100% 적용된 것은 2015부터였다.

정부가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사회적 부담을 낮추기 위해 일자리안정자금의 지원 대상에 아파트 경비원을 포함했지만 현장에서 휴게시간 늘리기 등 갖은 편법이 횡행하는 것도 이러한 상황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은 탓으로 풀이된다. 결국 최저임금 안착을 목표로 정부의 근로감독이 얼마나 제대로 이뤄질지도 향후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서울지역 아파트 경비 노동자 고용안정·처우 개선 추진위원회는 경비노동자의 처우 개선을 위한 이슈화 등 각종 사업을 이어갈 계획이다. 하지만 결국 아파트 단지별로 각각 해결해야 하는 사안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김준영 기자 papenique@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