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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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한경의 법률 톡톡] "비밀유지서약서만 쓰면 안심이라고?"

스타트업과 겸업금지 약정 문제 어떻게 봐야하나

산업계는 특화된 기술이나 새로운 아이디어 하나가 기업의 성패를 좌우하기도 한다. 특히 아이디어 하나, 기술 하나가 회사의 중추인 스타트업은 회사의 영업기밀이 빠져나갈 경우 그 타격이 막대하다. 퇴직자가 정보를 들고 나가거나, 근로자가 내부에서 알게 된 아이디어로 창업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에 따라 회사들은 ‘경업금지약정’을 맺고 ‘비밀유지서약서’를 받는다. 경업금지약정은 보통 근로자가 퇴직 후 동종 경쟁업체에 취업하거나, 동일업종으로 창업하지 않기로 하는 것을 말한다. 비밀유지서약서의 내용은 대동소이하며 재직 중 알게 된 회사의 비밀을 침해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약속이다.

아이디어나 기술로 승부를 보는 스타트업의 경우 가장 우려되는 사태가 영업비밀의 누출인 반면 근로자의 입장에서는 경업금지약정을 하게 되면 경력직으로 이직이 곤란해지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특히 근로자가 하고자 하는 사업에 제한이 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경업금지약정의 효력에 대해서 분쟁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최근 한 화장품 회사와 관련해 경업금지약정을 위반에 대한 위약벌이 지나치다는 법원 판결이 있었다. 고한경 변호사의 도움말을 통해 어떻게 된 경위인지 살펴보고 경업금지 약정의 조건에 대해 자세하게 알아보도록 하자.

◆경업금지 의무위반 2배의 위약벌 '무효'

화장품 제조·판매업체 A사에 입사한 K씨는 2014년 1월부터 중국에 있는 자회사에서 영업담당 임원으로 파견근무를 했다. 회사와 경영계약(기업 경영에 전문 노하우를 가진 대리인에게 경영을 위탁하고 기업은 대신 경영 대리인에게 일정의 수수료 지급할 것을 약정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이 계약에는 ‘K씨가 퇴직 후 2년 간 A사의 동의 없이 경쟁업체에 취업하는 것을 금지하고 A사의 고객을 경쟁업체로 유인하지 않는다. 이를 위반 시 연봉의 2배를 위약벌로 지급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K씨는 같은 해 3월 A사의 경쟁업체인 B사의 중국 지사 영업상무로 이직한 뒤 A사의 기존 판매대리상들과 거래했다. 이에 A사는 올 지난해 1월 K씨가 경업금지·고객유인금지 약정을 위반했다는 이유를 들어 2억1200여만원을 배상하라는 소송을 냈다.

법원은 A사의 손을 일부만 들어줬다. 재판부는 양측이 체결한 약정의 유효성과 K씨의 약정 위반 사실은 인정했지만 위약벌의 내용이 너무 과다해 일부 무효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의무의 강제로 얻어지는 채권자의 이익에 비해 약정된 위약벌이 과도하게 무거울 때에는 일부 또는 전부가 공서양속에 반해 무효가 된다”고 밝혔다.

◆경업금지 약정 5가지 조건

위 사례에서는 회사가 근로자가 약정을 준수하도록 하기 위해 위약벌을 두었는데, 경업금지의무와 근로자의 의무위반 자체는 인정됐지만 위약벌이 과도하다는 이유로 제한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회사측에서는 회사에 유리한 내용의 광범위한 내용의 약정서를 제시하는 경우가 많고, 근로자 측에서는 회사에서 요구하니 일을 하기 위해 경업금지 약정에 서명하는 경향이 있다. 때문에 사후적으로 그 효력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법원은 원칙적으로는 경업금지 약정이 유효하다고 보지만, 몇 가지 조건을 전제로 그 유효성을 부정하거나 효력을 제한하고 있다.

첫번째 ‘보호할 만한 가치 있는 영업비밀’인지 여부다. 근로자가 고용기간 중에 습득한 기술상 경영상의 정보를 사용해 영업을 했지만 그 정보가 동종업계 전반에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거나 입수에 그다지 많은 비용과 노력을 요하지 않았던 경우가 있다. 이때의 정보는 보호할 가치가 있는 이익에 해당하지 않거나 그 보호가치가 상대적으로 적은 경우에 해당한다고 보고 있다.

두번째는 근로자의 퇴직 전 지위 및 퇴직경위이다. 직급이 높을수록, 근무연수가 많을수록 경업급지 약정의 유효성이 인정될 가능성이 높다. 퇴직에 회사의 귀책 사유가 있다면 경업금지 약정의 효력이 부정될 가능성이 높다.

세번째는 경업제한의 기간, 지역 및 대상직종이다. 경업금지 약정의 제한기간이 장기간일수록 근로자의 직업선택의 자유가 제한된다. 재판부는 통상 1년 정도 내에서 제한적인 경업금지 약정의 유효성을 인정하고 있다. 회사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지역을 넘어서 지나치게 광범위한 지역을 경업제한 지역으로 설정할 경우 효력이 부정될 수 있다.

네번째는 대상(보상)조치의 여부이다. 경업금지 약정의 대가로 회사가 근로자에게 대상(보상)조치를 취했는지 여부를 판단하고 있다. 회사가 경업금지 약정을 요구하며 이에 대한 아무런 대가조치를 취하지 않은 경우 그 효력이 부정될 수 있다.

회사 입장에서는 사측에 유리한 내용으로 경업금지 약정을 만들고자 하지만 이는 지나칠 경우 오히려 근로자의 직업선택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돼 그 효력이 부정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비밀유지서약서를 쓰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임금, 복리후생, 담당직무를 고려해 경업금지나 비밀유지와 관련한 체계를 두고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