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을 기준으로 한국에 사는 외국인은 약 176만명으로 총 인구의 3.4%를 차지한다. 전라남도 인구에 육박한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아이가 집에 와서 외국인 친구의 이름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이미 다문화사회로 변화된 한국의 일상을 느낄 수 있다. ‘우리’라는 단어에는 양면성이 존재한다. ‘우리’에 속하지 못하는 남을 배타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아직도 존재하지만 지금 한국 사회는 이미 다문화사회에 진입했다고 볼 수 있다. 2006년 이후 본격적으로 실시된 정부의 각종 다문화 정책도 한국 사회의 긍정적인 변화에 영향을 끼쳤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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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0년대 후반부터 1870년대에는 상당수 조선 농민들이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했다. 당시는 이주나 귀화가 어려웠는데, 쇄국정책을 펼친 조선은 조국을 버리는 백성에게 사형에 처했다. 사진은 20세기 초 블라디보스토크 인근 조선인 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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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 초 블라디보스토크 조선 학교를 방문한 대주교. |
이와는 정반대의 경우도 있다. 러시아 쇼트트랙 선수 빅토르안(안현수)이 그렇다. 2014년 소치 동계 올림픽에서 빅토르안은 러시아 대표로 금메달 3개를 거머쥐었다. 러시아는 열광했다. 한 언론 인터뷰에서 러시아 출신의 한국 바이애슬론 국가대표 랍신은 쇼트트랙 경기장에서 빅토르안이 러시아를 흥분시켰듯이 바이애슬론 경기장에서 한국인들을 흥분시키고 싶다고 말했다. 빅토르안의 눈부신 활약으로 러시아에서는 관심도 없던 쇼트트랙이 국민 스포츠가 되었다. 한국계 미식축구 선수인 하인즈 워드 또한 미국에서의 전적이 대단했다. 2006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스포츠계의 반응도 뜨거웠지만 하인즈 워드의 행보는 정부의 다문화 정책 수립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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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평창군 알펜시아 바이애슬론센터 슈팅 레인지에서 사격 훈련을 하고 있는 귀화 선수 티모페이 랍신. 연합뉴스 |
1869년 우수리스크 지역으로 수천명의 조선 농민들이 이주해 갔다. 이렇게 많은 숫자가 이주해 올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제정러시아 지방관리는 되돌아갈 것을 명령하며 이 과정에서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도록 조선 관리들을 설득하고자 했다. 왜냐하면 당시 연해주에는 비축된 식량이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무력으로라도 내쫓겠다는 협박을 하기는 했지만 조선 농민들이 완강하게 강제송환을 반대했다. 제정러시아는 결국 조선 이주민들에게는 음식과 종자, 농기구, 가축 등을 제공하고 러시아에 남도록 허락했다. 이주민의 숫자는 점점 더 증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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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른쪽은 강원도 평창군 알펜시아 바이애슬론센터에서 대회를 준비 중인 귀화 선수 예카테리나 아바쿠모바. 연합뉴스 |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조선 사람들은 분배 받은 토지를 목장이나 초지로 사용하지 않고, 모두 개간하여 농사짓는 데 사용했다 점이다. 처녀지 개간에 뛰어든 한국인의 근면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연해주의 고위 관리였던 나세킨은 “이들이 조선으로 떠나게 되면 분명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극동지역은 수백명의 근면한 거주민을 잃게 되는 것이다. 세금까지 정확히 내고 있는데 이들의 존재가 극동지역에 상당한 이익을 가져오리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만약 한인들이 떠난다면 그 자리에 수백명의 떠돌이들만 남게 될 것이다.” 또한 19세기 말 영국의 여행가 비숍은 조선을 여행하며 비참한 모습들을 많이 목격했지만 연해주의 한인 마을을 방문한 후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연해주에서 나는 이 사람들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바꾸게 되었다. 농장주 계급으로서 번영하고 있었으며 이들에게서 근면 성실한 면을 엿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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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준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
이주의 배경과 과정이 복잡하고 순탄치 않지만 여전히 상호 이해와 소통을 바탕으로 한 다문화의 힘은 막강하다고 할 수 있다. 옛날 연해주, 그리고 중앙아시아의 개발과 발전에 큰 영향을 준 것처럼 한국의 다문화사회는 밝은 미래를 담보해 줄 것이다.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에서 태극기를 단 외국인 국가대표의 활약을 기대해 본다.
이영준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