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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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완식이 만난 사람] “전통의 재발굴 돋보인 평창 개막식… 내가 갈 길 보여줬죠”

한국화 현대적 모색 힘쓰는 권기수 작가/개막식에 뜬 ‘인면조’/대중에겐 생소했지만/고구려 벽화 속 신물/조선채색화서 출발한/울긋불긋한 내 화풍도/중국·일본풍 오해 사/전통은 영감 원천이자/한국미술 비추는 횃불/미래 문화자원 삼아야
수묵과 조선채색화의 화려한 전통을 횃불 삼아 한국미술의 오늘과 미래를 비추고 있는 권기수 작가. 그는 “한국화의 전통을 고구려 신라 등으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미래가 자연스레 보일 것”이라며 “전통은 ‘오래된 미래’”라고 강조했다.
미술계의 40대 기수로 꼽히는 권기수(46) 작가는 평창동계올림픽 개회식에 가슴이 벅차 눈시울을 붉혔다. 전통을 아우라로 삼아 작업하는 그에게 고구려 고분벽화의 인면조(人面鳥)를 불러내 세계인을 홀린 장면이 예사롭지 않았던 것이다. 홍콩아트페어에 출품할 작품을 마무리 중이던 그는 중계방송을 보면서 전통은 한국미술의 갈 길을 비추는 횃불 같은 존재라는 점을 더욱 확신케 됐다.

“전통은 고수보다는 전개에 방점을 찍어야 합니다. 불행한 근현대사가 전통을 추스르지 못하게 했습니다. 한국의 전통에 어떤 것이 있는지 분명하게 밝히는 것도 의미 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쇼에서 고구려의 여러 상징들, 특히 인면조 같은 경우는 일본이나 중국풍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은데, 여러 전통 요소들이 실상 일본이나 중국풍으로 곡해되는 경향이 있고 반대로 외국경향이 전통으로 둔갑하는 일도 많지요.”

그는 이번 오픈행사처럼 더 많은 전통 미감을 ‘공식적’으로 밝히는 일이 향후 작가나 시각문화 종사자들에게 훌륭한 아이디어의 원천이 될 것이라고 했다.

“저 개인적으로도 제 그림의 꽃이 사쿠라 같다거나 동구리가 일본식 이름이다(도토리 일본말과 우연하게 비슷)라거나 붉은색이나 금(동)색이 중국스럽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실상 우리 전통에 아주 많은 요소거든요. 최근 파도문양도 우키요에와 닮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일월도나 정선 그림에 숱하게 나오는데 말이지요.”

사실 그동안 일상 속에서도 우리 전통이 충분히 많은데, 일본이나 중국 문화로만 우선 생각하는 일이 많았다. 전통 요소에 대해서 학계나 미디어에서 심도 있게 다루지 못한 탓도 있다.

“다행히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선진화됨에 따라서 디자인이 발전하고 여러 분야에서 전통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니 긍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식이 전통의 재발굴(글로벌로 공식화)과 우수한 디자인 능력이 합쳐져 저예산 속에서도 너무 절묘하게 수행됐다는 점은 한국문화의 저력이라 생각합니다.”

전문가들은 인면조가 신라나 백제 고분의 출토품에서도 볼 수 있고, 중국 최초의 신화집 ‘산해경’에 다양한 인면조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고대 동북아에 널리 퍼져 있는 신화세계로 보고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과도 흡사하다는 반응도 있는데, 그것은 그만큼 일본이 전통요소를 대중문화에까지 녹여냈다는 말로도 해석이 됩니다. 전통은 이어가는 자의 소유물이 된다는 점을 각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라도 우리 주변의 전통을 미래의 풍성한 문화자원으로 인식하는 자세가 절실합니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동그란 얼굴의 동구리는 먹물로 콕 찍은 것 같은 눈과 먹선으로 그은 듯한 쭈뼛 선 머리카락과 빙그레 웃는 큰 입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팝적인 캐릭터(디자인)로 보고 있다.

“조선산수화 속 인물들을 묘사하는 전통을 잇고 있는 것입니다. 극히 단순화시켜 먹으로 눈코입만 찍고 몸통도 붓선으로 동글동글하게 그렸지요.”

그는 자신의 작품을 한국팝으로 해석하는 것을 단연코 거부한다. 글로벌 미술계에 호소력이 부족하다는 얘기다. 차별화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권기수 작가를 비롯해 이세현, 김기라, 홍경택, 홍지윤, 정재호 등 전통의 현대적 모색은 물론 초현대적 디지털작업을 하는 일군의 작가들을 공통적으로 묶어줄 수 있는 키워드가 필요하다는 것이 미술계의 중론이기도 하다.

“비평과 큐레이팅이 절실한 시점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텍스트가 약해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근현대미술이 약한 한국에선 여전히 활발한 비평작업이 필요합니다. 40대 작가들의 경우 20년 후 작품스토리가 될 겁니다.”

그는 미술계는 물론 음악, 문학 등 여러 분야의 인사들로부터 자신의 작품에 대한 다양한 글을 받아보려고 한다. 현대미술의 시선에서 욕을 하는 비평적 글도 수용해 비평집을 만들 계획이다. 필요하다면 다른 작가들의 언급도 열어두고 있다.

지난 일요일에 찾은 그의 연남동 작업실 사무공간에는 열대식물 트리피스가 무성했다. 요즘 그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녹색 잎사귀도 트리피스 잎이다.

“원래 조선회화에 등장하는 파초를 그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안 키워 봐 생김새를 잘 모릅니다. 대신 트리피스를 그리게 됐습니다.”

전통을 발판으로 한 발짝 더 나아가려는 자유로운 몸짓이다. 그는 열대우림의 휴양지 같은 분위기에서 기분전환을 해본다고 했다.

파초를 연상시키는 열대식물 잎사귀를 화폭에 초대한 작품.
매화 같은 이미지들은 또 어떤가. 검은 선과 무지개색 색면 줄기의 어우러짐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매화를 그리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궁극의 아름다운 형태를 만들려고 하다 보니 점이 되고 원이 됐습니다. 몇 개의 원을 붙이니 꽃모양이 된 꼴이지요.”

그는 동양화 전공자 피가 은연중에 매화를 닮게 해주지 않았나 생각한다. 원이 선이 되고 네모로 변신도 한다. 분수 모양새도 난초 같다.

“제 그림의 원형은 동그라미라고 할 수 있어요.”

그의 선은 네모가 되고 큐빅도 된다. 전통회화에 등장하는 괴석이나 절벽을 연상시킨다. 요즘 사람들은 아파트로 보기도 한다. 전통과 현대의 어우러짐이다.

화려한 무지갯빛 이미지는 전통산수화에 등장하는 무지개다리에서 가져왔다. 봇짐꾼이나 선비들이 지나가던 계곡 사이를 잇는 아치형 다리다. 이 세상과 이상세계를 연결하는 상징적 통로이기도 하다.

“제 그림에선 둥근 무지개가 직선무지개가 되고 구름이 산수가 됐습니다. 화려한 색상은 조선채색화 전통을 기반으로 한 것입니다.”

그는 불행한 역사 속에 왜색 논란에 치인 한국채색화 전통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가 개발한 다양한 색채가 일련번호가 적혀져 작업실에 정돈된 모습은 흡사 연구실을 방불케 한다. 작업에 대한 그의 치열성을 엿볼 수 있다.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wansi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