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대선에서 여야 후보 모두 6월 지방선거·개헌 투표 동시 실시를 공언했으니 그 약속을 지키겠다는 청와대에 딴죽 걸 일은 아니다. 대통령 힘이 빠진 말년에야 개헌을 국면전환 카드로 써먹던 패턴을 감안하면 문재인정부의 개헌 의지만큼은 살 만하다. 문제는 청와대발 개헌의 성사 여부다. 결론부터 말하면 정부 주도의 개헌안이 성공할 가능성은 없다. 지난 아홉 차례 개헌 중 여야 합의로 이뤄진 건 4·19혁명과 1987년 ‘호헌철폐’ 시위 직후, 두 차례뿐이다. 권력자의 집권욕에 누더기가 된 과거 헌정의 흑역사와는 다르다 해도 ‘청와대표’ 개헌안은 정쟁 대상이 될 게 뻔하다. “문재인표 개헌안으로 자유한국당 반대를 유도해 개헌 무산의 책임을 뒤집어씌운 뒤 지방선거에 이용하려는 얄팍한 수”(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라는 반응이 단적이다.
청와대가 기대는 건 개헌 찬성 여론이다. 각종 여론조사에 따르면 70%가 넘는 응답자가 개헌을 지지한다. 지난해 촛불의 기억도 남아 있다. 1987년 민주화 시위를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얻어낸 국민들은 30년 뒤 촛불 시위를 통해 헌법적 절차에 따라 현직 대통령을 탄핵하는 경험을 공유했다.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 정해구 위원장은 지난 7일 기자간담회에서 “국민의 뜻과 촛불 민심을 반영하는 개헌안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개헌에 관한 ‘국민의 뜻’은 뭘까. 세계일보는 창간여론조사(2월1일자)를 통해 개헌 방향과 논의 방식에 관한 국민 의견을 물었다. 개헌의 중점 추진 방향을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32.8%가 ‘정부형태/권력구조 조항’을, 31.6%가 ‘국민의 권리/기본권 조항’을 꼽았다. 국정농단 사건을 낳은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없애고 국민이 누려야 할 권리를 헌법으로 보장받겠다는 뜻이다.
특위는 테이블에 정부형태와 총강·기본권, 지방자치분권을 올려놓았지만 방점은 기본권, 자치분권에 찍혀 있다. 권력구조 개편안을 내놓는다 해도 ‘어차피 결과는 대통령중임제’일 공산이 크다. 문재인 대통령이 선호하고 여당의 사실상 당론이거니와 찬성 여론도 높은 편이다.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국민이 대통령 4년 중임제를 실제 지지하는 건지, 중임제를 선호하는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이 반영된 건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대통령 탄핵 파동을 겪으며 헌법책이 평소보다 많이 팔렸다고는 하나 대통령중임제와 이원집정부제, 의원내각제의 장단점을 따져본 국민은 많지 않을 것이다.
황정미 편집인 |
대통령 표현대로 헌법은 ‘국민의 삶을 담는 그릇’이다. 시간에 쫓겨 투박한 그릇을 만드느니 오래오래 요긴하게 쓸 ‘명품’을 만들 궁리부터 했어야 했다. 문 대통령은 신년회견에서 신고리 원전 5·6호기 공론화위원회 활동을 성공한 ‘숙의 민주주의’ 사례로 평가했다. 국가 정체성과 국민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개헌이야말로 ‘숙의 민주주의’ 대상이다.“헌법은 놀랄 만큼 아름다운 선물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양피지에 불과하다. 헌법에 힘과 의미를 부여하는 건 국민의 참여와 선택, 단결에 의해서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고별사다. 10차 개헌만큼은 정치 엘리트나 전문가 주도가 아니라 폭 넓은국민 참여로 이뤄져야 한다는 게 ‘민심’일 텐데 청와대 특위의 개헌안이 답이 될 수는 없다.
황정미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