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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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46% "성폭력·성희롱 경험"…女 61.5%가 피해

영화계 성폭력 실태 조사 / 영진위 , 공식적 대규모 첫 조사 / 20·30대 94%… 男 17% 피해 / 원치 않는 성관계 요구도 7.5% / 대처 방식 “그냥 넘어갔다” 80%
“감독이 갑자기 없던 장면 하나 만들어서 ‘조금 더 섹시하게 찍고 싶지 않냐’고 묻는 거예요. 여배우가 못하겠다고 하면 스태프가 피곤하고 짜증난다는 표정을 지어요. 그러면 배우만 되게 까탈스러운 여자가 되는 거죠.”(영화배우 A씨)

“조감독이 여성 스태프를 좋아했는데 안 받아주니 스토킹 비슷하게 하다가, 나중에는 현장에서도 괴롭히는 거예요. 겉으로는 점잖고 일 잘하는 사람이라 사람들은 남자 말을 더 신뢰하고. 이런 상황이 오면 여성 스태프가 더 이상 일을 못하겠다고….”(촬영감독 B씨)

영화계 전반에 퍼진 성폭력·성희롱 실태가 드러났다.

영화진흥위원회와 여성영화인모임은 12일 서울 광화문 프레스센터에서 ‘영화계 성평등 환경 조성을 위한 성폭력·성희롱 실태조사 결과발표 및 토론회’를 열고 지난해 7∼9월 배우와 스태프 등 영화인 749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를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의 46.1%가 성폭력이나 성희롱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중 여성이 61.5%, 남성이 17.2%로 여성의 피해 비율이 3배 이상 높았다. 연령별로는 20대가 45.9%, 30대가 48.3%로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가해자 지위는 상급자(48.7%), 교수자(9.9%) 등 권력의 우위에 있는 자가 60%에 달했다.

가장 많은 피해 유형은 외모에 대한 성적 비유나 평가, 음담패설(28.2%)이었다. 술을 따르거나 옆에 앉도록 강요하는 행위, 원치 않는 술자리를 강요하는 행위가 23.4%로 뒤를 이었고 가슴, 엉덩이 등 특정 신체부위를 쳐다보는 행위도 20.7%로 높았다. 원하지 않는 성관계를 요구받은 피해는 7.5%로 나타났다.

성폭력이 발생했을 당시 대처한 방식에 대해서는 ‘문제라고 느꼈지만 참았다’, ‘모른 척하면서 살짝 피했다’ 등 그냥 넘어갔다는 응답이 80% 이상이었다.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는 ‘넘어가는 것이 제일 나은 방법으로 생각돼서’, ‘업계 내 소문, 평판에 대한 두려움 때문’ 등이라고 답해 소문과 인맥이 중요시되는 영화업계 특성이 많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이번 조사는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운동 이전인 2016년 말 문화예술계에서 촉발된 성폭력 근절 해시태그 운동을 계기로 실시됐다. 영진위가 공식적인 대규모 성폭력 실태조사에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분석을 진행한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성폭력·성희롱 경험이 46.1%에 이르는 것은 전국단위 실태조사와 비교해 높은 수치이며, 영화인들의 성평등에 대한 관심을 반영한 결과로 풀이된다”며 “이를 시작으로 문화예술계 전체에 성평등 환경을 확립하려는 노력이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이날 행사는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의 개소식도 겸해 열렸다. ‘든든’은 여성영화인모임을 주축으로 1년의 준비기간을 거쳐 지난 1일 출범했다. 심재명 명필름 대표, 임순례 영화감독이 공동대표를 맡아 성폭력 예방 교육과 피해자 상담 및 지원 등 영화산업 내 성평등 환경 조성을 위한 사업을 진행할 계획이다.

임 감독은 “그동안 한국 영화계에 영화인들도 깜짝 놀랄 만큼 지속적이고 끔찍한 성폭력이 있었다는 것이 드러났다”며 “성폭력 상처를 안고 영화계를 떠났던 동료 여성영화인들이 다시 편한 마음으로 현장에 돌아오도록, 예비 영화인들이 걱정 없이 꿈꿀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 토론에 참석한 배우 문소리는 “현재 많은 영화인이 영화계 성폭력 문제를 우리 전체의 문제로 인식하며 반성하는 마음으로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고 있다”면서 “과정에 올바름 없이 결과가 아름다울 수는 없으니, 주목 받는 때일수록 과정의 올바름을 위해 다 같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희원 기자 azahoit@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