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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장의 입이 열리면… 前대통령들 구속 못 피했다

문무일 "숙고하고 있다"… 1년전 김수남 "오직 법·원칙 따라 판단할 문제" / '검사동일체' 원칙 폐지됐어도 조직의 중요한 결정은 여전히 검찰총장 몫 / 전 대통령 구속영장 청구서 직업란엔 '무직'… 권불십년·인생무상 보여줘
이명박 전 대통령 수사를 지휘하는 문무일 검찰총장. 연합뉴스
“숙고하고 있습니다.”

문무일 검찰총장은 19일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으로 출근하는 길에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 여부를 묻는 기자들한테 내놓은 답변이다. 앞서 서울중앙지검 윤석열 검사장과 수사팀은 지난 16일 이 전 대통령 중간수사 결과를 문 총장에게 보고했다. 수사팀은 지난 14, 15일 이틀간 소환조사를 받은 이 전 대통령의 주요 진술 내용과 수사 과정에서 확인된 각종 증거관계, 법리적 쟁점 등을 문 총장에게 보고한 것으로 전해졌다.

수사팀 보고서에는 구속영장을 청구하는 방안과 영장 청구 없이 불구속 수사해 기소하는 방안 각자의 장단점을 분석한 내용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내에서는 수뢰 혐의액만 110억원대에 달해 사안이 중대하고, 이 전 대통령이 혐의를 대부분 부인해 증거인멸 우려가 크다는 점 등을 들어 “구속영장을 청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받고 있다.

검찰조직은 오랫동안 ‘검사동일체’ 원칙에 의해 운영돼왔다. 이는 서로 비슷한 사건인데도 어떤 검사가 수사를 담당하느냐에 따라 처분 결과가 달라지는 ‘고무줄 잣대’를 막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도입된 것이다. 전국의 검사들 전부가 마치 한 몸이 된 양 똑같은 사건에선 똑같은 처분을 내려야 한다는 뜻이다. 이를 위해선 검찰총장 등 지휘부가 일선 검사들을 지휘·감독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다만 검사동일체라는 표현이 지나치게 권위적이고 ‘상명하복’을 강요하는 것처럼 들린다고 해서 2004년 검찰청법을 고칠 때 검사동일체를 ‘검찰사무에 관한 지휘·감독관계’로 고쳤다. 비록 용어는 바뀌었으나 검찰조직은 아직도 검사동일체 원칙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직의 총수이자 사건 처리의 최고 결정권자로서 총장의 권위는 여전히 절대적이다. 전직 대통령이 연루된 중대 사건의 경우는 더더욱 그러하다.

지난해 비선실세 국정농단 사건과 관련해 박근혜 전 대통령을 구속한 결정도 김수남 당시 검찰총장이 직접 결단을 내렸다.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본부는 지난해 3월21일 박 전 대통령을 피의자로 불러 이튿날 오전까지 조사했다. 조사가 끝나고 수사팀은 김 총장에게 결과를 보고했다. 당시 김 총장은 대검 청사로 출근하는 길에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오로지 법과 원칙, 수사 상황에 따라 판단돼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사실상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수사가 불가피함을 내비친 발언으로 풀이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 수사를 지휘해 구속 결정을 내린 김수남 전 검찰총장. 세계일보 자료사진
결국 소환조사 닷새 만인 지난해 3월27일 검찰은 박 전 대통령에 대해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수수 등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서울중앙지법의 영장전담 판사 3명 가운데 나이로나 사법연수원 기수로나 제일 ‘막내’였던 강부영 판사(현 청주지법 부장판사)가 영장실질심사를 맡아 지난해 3월31일 새벽 영장을 발부했다. 영장심사 후 서울중앙지검 청사에서 대기하던 박 전 대통령은 자신의 상징과도 같은 올림머리를 풀고 수사관들에 이끌려 경기 의왕 서울구치소로 향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1995년 11월15일 뇌물수수 등 혐의로 2차 소환조사를 받았다. 조사가 마무리되고 이튿날인 1995년 11월16일 노 전 대통령을 수사한 옛 대검 중수부가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영장 청구 직전 김기수 당시 검찰총장이 청구서를 최종적으로 검토한 뒤 결재했다. 그날 오후 1시25분 옛 서울지법에 접수된 영장은 김정호 판사(현 변호사)의 심사를 거쳐 약 5시간 15분 만에 발부됐다. 영장실질심사가 없던 시절이어서 판사가 검찰이 낸 수사기록만 보고 영장을 기각 또는 발부했기 때문에 결정이 지금보다 훨씬 빨랐다. 당시 구속영장 청구서의 피의자 직업을 기재하는 란에는 ‘무직(전 대통령)’이라고 적혔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95년 12월2일 검찰에 출석하라는 통보를 받았으나 이를 거부하고 연희동 집 근처에서 이른바 ‘골목성명’을 발표한 뒤 고향인 경남 합천으로 떠났다. 당시 김기수 검찰총장은 대검 집무실에서 오전 9시부터 TV로 생중계된 골목성명을 지켜봤다. 이후 대검 간부들을 소집해 회의를 열고 대응방안을 논의했다. 여기서 구속영장 청구 방침이 정해져 수사팀인 서울지검 특별수사본부에 하달됐다.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수사를 지휘해 구속 결정을 내린 김기수 전 검찰총장. 세계일보 자료사진
급하게 구속영장 청구서를 만든 최환 당시 서울지검장이 그날 오후 5시 김 총장을 찾아가 직접 보고했다. 총장의 결재가 떨어진 것은 약 1시간 만인 오후 6시였다. 6시10분 서울지법에 접수된 전 전 대통령 구속영장은 약 3시간 10분 만인 그날 밤 11시20분 발부됐다. 검찰은 즉각 수사관들을 합천으로 보내 체포 절차를 밟은 뒤 이튿날인 1995년 12월3일 새벽 전 전 대통령을 서울로 압송했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