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와 당나라의 갈등이 고조되며 전쟁 위기로 치닫을 무렵 문무왕은 명랑법사를 불러 대응책을 물었다. “(경주) 낭산 남쪽에 사천왕사를 세우고 도량을 열면 좋겠습니다.” 법사의 말대로 했더니 신라에 쳐들어오던 당나라 군사들이 서해에 수장됐다. 삼국유사가 전하는 사천왕사 건립(679년)의 배경이다. 사천왕사는 신라의 삼국통일을 이끌었던 호국불교의 대표사찰이었다.
사천왕사의 정확한 폐사 시점은 알 수 없으나 조선왕조실록, 매월당 김시습의 시집 등을 보면 조선 건국 직후인 1400년대 초반까지는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8월5일까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국립경주박물관이 공동으로 여는 특별진열에 나온 ‘사천왕사 녹유신장상’ 3점은 지금 시점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천왕사의 가장 구체적 형태다. 폐허로만 남았던 600여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대중과 다시 직접 만나며 절이 과거에 누렸던 위상와 영광의 일단을 재현한 것이다.
경주 사천왕사터에서 출토된 녹유신장상은 200여 점의 파편을 조립하고, 참고하는 과정을 거쳐 신라시대의 온전한 모습으로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 사진은 왼쪽 위부터 반시계방향으로 A형 신장상의 파편과 일부 조립된 모습, 복원 후의 모습.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
경주 사천왕사터에서 녹유신장상이 처음 발견된 것은 1915년이었다. 부서진 파편에 불과했지만 섬세하고 사실적인 표현, 뛰어난 조형성,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어 당시부터 신라 불교조각의 걸작으로 주목을 받았다.
기록에 따르면 이 뛰어난 조각품은 ‘양지’(良志)라는 스님이 만들었다. 그는 서예가 김생, 화가 솔거, 음악가 백결과 함께 신라를 대표할 예술가로 꼽힐 만한 뛰어난 조각가였다. 삼국유사에는 선덕여왕 때 활동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으나 녹유신장상의 제작자라는 점에서 사천왕사가 창건된 문무왕 때까지 활동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양지 스님은 여러가지 기예에 통달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사천왕사의 녹유신장상뿐만 아니라 영묘사 장육존상과 천왕상, 법림사 주불과 좌우금강신, 석장사 탑삼천불 등이 모두 그의 작품이다. 글씨도 잘 써 영묘사와 법림사 등 큰 절의 현판을 직접 썼다고 전한다.
그러나 작품 활동 외에 전하는 바가 적어 양지 스님의 출신과 이력 등을 두고 각종 설이 분분하다. 삼국유사에 그의 전기가 전한다는 점에서 신라인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조각상 형식, 제작 방식 등이 고대 인도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점에 근거해 서역에서 온 외국인일 것이란 추정도 제기된다. 또 신라에 와당 제작술 등을 전한 백제 승려일 것이란 견해도 있다.
사천왕사의 B형(왼쪽), C형 녹유신장상은 A형과 함께 세 종류가 한 묶음으로 목탑의 기단 부분에 배치됐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
일제강점기에 발견되기는 했으나 녹유신장상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와 복원작업은 2006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조사를 하면서 시작됐다.
녹유신장상은 사천왕사의 금당 앞에 세워진 목탑 두 기의 기단 부분을 둘렀던 것이었다. 모두 48점이 제작되었는데, 각각을 따로 만든 것이 아니라 ‘A·B·C형’ 세 종류의 틀을 만들어 찍어내 그것을 한 묶음으로 배치했다.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B형을 가운데 두고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는 A형은 오른쪽에, 왼쪽을 바라보고 있는 C형은 왼쪽에 두어 신장들이 목탑 주변 사주를 경계하는 듯한 형태를 취했다.
연구는 파편을 이용해 녹유신장상의 온전한 모습을 복원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사천왕사터 발굴에서 확보된 파편 200여점을 먼저 A형, B형, C형으로 분류해 최대한 맞추어 전체적인 형태를 갖춰 갔다. 이때 맞춰지지 않는 부분은 다른 파편을 이용해 온전한 도상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박윤정 연구관은 “이런 과정을 거쳐 녹유신장상의 도상을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었다”며 “실물 파편이 존재하지 않는 일부 부분만 따로 제작해 메꿔 넣었다”고 말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