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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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박스' 눈 감은 정부] 부모에 버림받고 사회에 외면받는 '베이비박스' 아이들

정부, 10년째 ‘베이비박스 딜레마’ / 허용 땐 “유기” 금지 땐 “외면” 비난 / 지자체 관리부실로 입양기회 막혀 / 18세까지 복지시설 전전하다 퇴소 / 정부 年 3000억 보조금 쏟아붓지만 / 시설 환경 열악…아이 미래 ‘나 몰라라’ / “정부·지자체 직접 요보호 아동 관리 / 원가정보호·아동인권 신장 나서야”
부득이한 사정으로 아이를 키울 수 없게 된 부모가 아이를 두고 갈 수 있도록 마련된 상자 ‘베이비박스’. 이곳에 유기된 아기 대부분은 18살이 될 때까지 여기저기 시설을 맴돌다 결국 혈혈단신으로 사회에 내몰린다.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아동 유기를 줄이려고 노력하기는커녕 유기된 아동 현황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1일 베이비박스를 운영하는 서울 관악구 주사랑공동체교회에 따르면 2009년 운영을 시작한 이래 지난해까지 베이비박스에 유기된 아기는 총 1363명에 이른다. 2012년까진 100명을 밑돌던 숫자가 2013년 갑자기 252명으로 급증한 뒤 지난해까지 연간 200명대를 유지하고 있다.
베이비박스에서 아이가 발견되면 교회 측이 1차로 관악경찰서에 유기 아동 발생 신고를 한다. 이후 관악구청과 서울시 등을 거쳐 지역별로 보육원 등 아동복지시설에 보내져 출생신고 절차를 밟는다.

이후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 이곳저곳 아동복지시설을 전전하다가 18세가 돼 시설을 떠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 아동복지시설 관계자는 “사회복지 혹은 아동인권의 소명을 갖고 임하는 분도 있지만 대부분 시설 운영에 급급한 것이 현실”이라며 “아이가 한 명 늘어날 때마다 정부 지원금을 그만큼 더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최대한 시설 밖으로 내보내려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아동 입양을 희망하는 부부들은 발만 동동 구른다. 지자체에서 주도적으로 절차를 진행해야 하는데 가장 큰 서울시조차 담당 직원이 단 한 명인 탓에 버거워한다. 결국 베이비박스 아이 중 서울시를 통해 입양된 경우는 2016년 22명, 2017년 23명에 각각 그쳤다. 나머진 18세가 될 때까지 시설을 맴돌아야 하는 처지다. 최근 베이비박스를 통해 신생아를 입양한 A씨는 “아무래도 신생아가 ‘연장아’(보통 만 1세 이상)보다 입양이 수월한 편이지만 베이비박스를 알고 있는 입양희망 부모는 극히 드물다”고 말했다.

베이비박스 운영이 어느덧 10년째에 접어들었지만 현실은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다. 아동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국가 차원의 노력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이다. 주사랑공동체교회 조태승 목사는 “저출산, 미혼모 등 다양한 가치가 얽힌 복잡한 문제이지만 기본적으로 한 사람의 인생이 걸린 만큼 아이가 자랄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 무엇인지를 먼저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아동 유기에 눈감고 책임도 안 지는 정부

정부 입장에서 베이비박스 문제는 딜레마다. 정부가 유기 아동 구제를 위해 베이비박스를 허용하면 결과적으로 아동 유기를 허용하는 셈이 된다. 그렇다고 아동 유기를 막기 위해 베이비박스를 금지하면 유기 아동을 외면한다는 비판을 감수해야 한다. 베이비박스의 유래는 12세기 유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수도원들이 유기된 신생아를 살리기 위해 베이비박스 운영을 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19세기 들어 잠시 자취를 감췄지만 2000년을 전후해 유럽 국가들과 미국 등에서 다시 운영되고 있다.

단순히 찬반의 문제가 아니라 임신·출산에 대한 여성의 자기결정권 존중 등 여러 측면을 고려한 끝에 장기적으로 베이비박스가 필요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단기적으로 베이비박스가 필요하다는 공감대에 이르렀다.

우리나라는 세계적 흐름과 정반대로 가고 있다. 정부는 아동 유기에 별다른 해결책을 내놓은 적이 없다. 아동유기는 형법상 2년 이하 징역 또는 3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해지는 범죄인데, 경찰이 베이비박스에 아기를 놓고 간 부모를 처벌한 전례는 없다. 
◆돈만 쏟아붓고 현황 파악도 제대로 안 돼

정부는 베이비박스 현황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베이비박스가 미인가 시설이다 보니 정부가 법적으로 개입할 근거가 없다.

지난해 주사랑공동체교회가 베이비박스를 통해 받아들인 유기 아동은 210명이다. 그런데 지자체와 병원을 거치면서 숫자가 달라진다. △관악경찰서 145명 △관악구 152명 △서울시립어린이병원 146명으로 들쭉날쭉하다. 정부나 지자체, 경찰 모두가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미인가 시설이기 때문에 통계 관리에 착오가 있을 수 있다”는 답만 되풀이한다.

아이들이 시설로 넘어간 뒤에는 정부가 예산만 쏟아붓고 사실상 방치하는 상황이 이어진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정부가 지원하는 아동은 전국의 아동복지시설 281곳, 1만3000여명(2016년 기준)에 이른다. 정부는 1명당 매달 보조금으로 200여만원을 지급한다. 연간 3000억원이 넘는 예산이 투입되는 것이다. 이 중 얼마나 아이를 위해 쓰이는지를 놓고 논란이 많다. 보호자가 없는 아동들이라서 기초생활수급비까지 시설(시설장)로 지급된다. 정부 지원금 규모는 더욱 클 수밖에 없다. 정부는 “각종 규정과 예산 투입을 근거로 모니터링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민간을 감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잊을 만하면 아동복지시설 내 집단 폭행 및 부실 운영 등의 사건이 되풀이되는 이유다.
◆생명권 명시 등 국민 요구는 커지는데…

전문가들은 정부가 요보호아동 분야를 일반 아동과 분리해서 민간에 관리를 미루다 보니 여러 문제가 생긴다고 지적한다. 경제는 크게 성장했으나 요보호아동은 사실상 방치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도 민간 아동복지시설에 크게 의존하고 입양도 선진국과 달리 민간 입양기관 주도로 이뤄지는 실정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이 해외로 입양을 보낸 아동은 17만여명에 달한다.

요보호아동을 줄이기 위한 정책은 아동복지시설이나 입양기관에 예산을 지원하는 데 그쳤다. 원가정 보호나 아동인권 신장이라는 근본적 해결에는 손도 대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입양 등에 관한 국제적 기준인 헤이그국제입양협약에 2013년 가입해 놓고서도 관련 입법은 지지부진해 ‘2년 내 비준’ 약속도 지키지 못하고 있다.

최근 청와대가 공개한 개헌안에 생명권이 신설된 것은 국민적 요구가 그만큼 크다는 걸 보여준다. 복지부 관계자는 “헤이그협약의 조속한 비준을 위해 입양특례법 등 제도 개선을 논의하는 중”이라며 “인권보호 및 다양한 국민적 요구 충족을 위해 다각적으로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김준영·권구성·안승진 기자 papenique@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