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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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氣 살리자] 학교·학원·학원·학원·집…당신의 자녀는 행복할까요?

⑤ ‘놀 권리’ 박탈당한 한국 아이들 / 학교 끝나면 쫓기듯 학원으로… "놀 시간도 장소도 없어요"
초등학교 5학년 수정(11·가명)이의 하루는 쉴 틈이 없다. 오후 2시30분 학교 수업이 끝나면 수정이는 영어학원으로 향한다. 학원에 도착해 1시간 동안 수업을 들은 뒤 곧바로 같은 건물에 있는 수학학원으로 이동한다. 그다음은 피아노학원 순서다. 수정이가 하루 총 3군데의 학원 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는 시간은 오후 6시40분이다. 집에 왔다고 맘껏 놀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오후 8시부터는 학교와 학원에서 내준 숙제를 해야 한다. 숙제를 마치면 보통 밤 10시다. 잠자리에 누운 수정이는 스마트폰으로 친구들과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그나마 이때가 하루 중 가장 편히 쉴 수 있는 시간이다.

흔히 ‘아이들은 놀면서 큰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어린이·청소년들에게 ‘놀 권리’는 딴 나라 얘기다. 학업에 쫓기는 아이들은 놀이문화를 접할 시간도, 장소도 부족하다. 아이들한테 놀이는 유엔아동권리협약에 명시된 엄연한 ‘권리’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2011년 유엔의 국가보고서 심의에서 “아동권리협약을 이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80여개 이행과제를 권고받았을 만큼 아동·청소년의 인권실태가 열악하다. 심각성을 느낀 정부는 2015년 아동정책기본계획을 발표했지만 수정이처럼 여전히 ‘놀지 못하는’ 아이가 많다.

◆아동·청소년의 ‘놀 권리’, 사교육과 상충

어린이·청소년들의 놀 권리가 보장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사교육이다. 입시와 취업 등 경쟁이 치열하고 맞벌이 가정이 늘면서 학원을 다니는 청소년이 증가하다 보니 어린이·청소년들의 일과가 ‘학교→학원→집’으로 고정되다시피 했다.

4일 통계청의 ‘2017 청소년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어린이·청소년의 사교육 참여율은 67.8%에 달한다. 학교별로는 초등학교 80%, 중학교 63.8%, 고등학교 52.4% 순이다. 학생 1인당 월평균 사교육비는 25만6000원이다.

수정이의 어머니(40)는 “아이가 한창 뛰어놀 나이지만 다른 아이들이 모두 학원을 다니는데 혼자만 안 보낼 순 없다”며 “요즘은 학원에 안 가면 친구도 없다더라”고 털어놨다. 높아진 교육열은 청소년들의 놀 권리와 상충한다. 사교육 시간이 늘수록 청소년들의 놀이 시간이 부족해지고 놀이문화도 형성되지 못하는 것이다. 청소년들은 학업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해소할 마땅한 방법도 찾지 못하겠다고 하소연한다.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의 ‘한국 아동·청소년 인권실태 2017’에 따르면 행복하지 않은 이유로 ‘학업 부담’을 호소하는 청소년이 42.9%에 달했다. 자퇴 충동을 느낀 청소년들도 ‘공부가 하기 싫어서’라는 응답이 67.2%로 가장 높았다.

김연하 경희대 교수(아동가족학)는 “예전에는 청소년들의 놀이문화가 분명 존재했는데 교육열이 높아지면서 거의 사라졌다”며 “교육을 중시하는 사회적 풍토가 견고해 놀 권리가 소외받는 측면이 있다”고 분석했다.

◆“TV 시청·인터넷 게임 등이 놀이의 전부”

상황이 이렇다 보니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 집 밖을 나서는 청소년을 찾아보기 어렵다. 대부분의 청소년이 놀더라도 집에서 혼자 보내거나 스마트폰 등을 통해 친구들과 소통하기 때문이다.

여성가족부의 ‘2017 청소년종합실태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청소년이 저녁식사 이후 가장 많이 하는 것은 공부(24.9%)나 학원(8.4%), 자율학습(7.3%) 등 학업이라는 응답자가 34.9%로 가장 많았다. 여가로 볼 수 있는 활동도 TV 시청(23%)이나 인터넷 게임(16.8%) 등 주로 집에서 혼자 하는 활동이 많았다. 
중학교 2학년 박모(14)군은 “학교나 학원에서 보내는 시간이 워낙 많아 친구들을 따로 만나는 경우는 별로 없다”며 “집에 오면 스마트폰으로 카톡 메시지를 주고받는 정도”라고 말했다.

청소년들의 스마트폰 의존도는 점점 높아지고 있다. 통계청 조사에서 지난해 10∼19세 어린이·청소년의 스마트폰 과다의존 위험군 비율은 30.6%에 달했다. 중학생이 34.7%로 가장 높았고 고등학생 29.5%, 초등학생 23.6% 순이었다.

또래와 놀이문화를 형성하지 못한 청소년들이 다른 문화생활을 즐기는 것도 아니다.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에 따르면 청소년 가운데 ‘문화예술공간을 1년에 한 번도 이용하지 않았다’는 응답자는 16%, ‘1년에 1∼2회 정도 이용한다’는 응답자는 24.9%에 각각 달했다. ‘일주일에 1∼2회 이상을 찾는다’는 응답자는 3.7%에 불과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이 또래집단과 놀이문화를 형성하지 못하면 정서불안이나 사회적 단절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선영 초록우산어린이재단 팀장은 “교육에는 입시만 있는 것이 아닌데 청소년들의 놀이문화는 상당히 저평가돼 있다”며 “청소년들은 놀이문화를 통해 앞으로 삶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나갈 것인지 배운다”고 강조했다. 놀이 전문가 김주연씨는 “어른들도 누구나 자신만의 놀이를 찾는 것처럼 청소년들이 놀고 싶어 하는 건 일상의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한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며 “아이들이 놀 때 부모나 교사가 가급적 개입하지 말아야 ‘제대로’ 놀 수 있다”고 조언했다.

권구성·김주영 기자 ks@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