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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롤링페이퍼-20대] "또래 일이라 평생 못잊어…세월호는 지키지 못한 어린 동생"

[세월호 4년, 슬픔에서 기억으로①]
2014년 4월16일 세월호 참사로 둘째 딸 유예은 양을 잃은 아버지 유경근 씨는 언젠가 세월호 희생자들을 위한 한 추모 미사에서 다음과 같이 호소했습니다.

“저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잊혀지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잊혀지고 우리가 잊혀지는 것입니다. 가장 큰 위로는 잊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잊지 않는다는 것, 그건 기억하는 것이요 기록하는 것일 겁니다. 1년 뒤에만 기억하는 게 아니라 2년 뒤, 3년 뒤, 10년 뒤, 100년 뒤에도 기억하는 유일한 방법은 기록하는 길이라 저희는 믿습니다.

세계일보는 이에 세월호 4년을 맞아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세월호 이야기를 최대한 채록하거나 인터뷰해 공유하고자 합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 지지를 부탁합니다.

*자신만이 기억하는 세월호 이야기나 기억, 관련 자료가 있다면 세계일보로 사연이나 자료를 보내주십시오. 기록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면 독자 모두와 공유하겠습니다. 보내실 이메일은 kimgija@segye.com 또는 homospiritus1969@gmail.com, 전화 번호 02-2000-1181.*


◆“SNS로 처음 접해...동급생 일 평생 잊기 힘들 것”

대학생 문정인(21·선문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그날 오전 7시30분쯤 학교(서울 도봉구 창동 서울외국어고)에 등교해 평상시처럼 수업을 듣고 공부를 했다. 2, 3교시쯤 끝나고 쉬는 시간에 우연히 휴대폰을 열었다가 사고를 접하게 됐다. 트위터를 통해 사고를 알게 된 거다. 또래 동급생들의 사고여서 큰 충격이었다. 곧이어 누군가 세월호 사고가 발생했다고 말하면서 반 친구 모두 사고를 알게 됐다. 선생님들은 우리들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오후에 뉴스를 통해 사고를 정확히 알게 됐다. 이후 세월호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견해는 없었지만 잊지는 말아야겠다고, 세월호를 기억하자고 친구들과 함께 교복을 입고 세월호 뱃지나 리본을 사서 나눠주기도 하고 홍대 앞에서 세월호를 상징하는 노란 종이배를 만들어 배포하기도 했다. 또래 동급생들이 당한 사고여서 평생 잊기 힘든 사건 같다. 이전에는 어른들이 말하면 대체로 무조건 옳다고 어렴풋이 생각했지만 세월호 사건을 겪으면서 어른들도 사람이고 실수할 수 있다고 비판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됐다. 

어른들이 맞지 않을 수도 있고,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거다. 그해 9월 노원역 앞에서 세월호를 기억하자는 취지로 세월호 리본을 나눠주는 캠페인을 하고 있는데 한 아저씨가 와서는 ‘누가 시켰느냐, 돈받고 하는 것이냐’라며 화를 내더라. 우리는 단지 기억하자고 하는데 ‘왜 그런 반응을 할까’ 하는 생각에 의아하더라. 언론이나 신문의 신뢰성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됐다. 사고 당일 처음에는 모두 구조됐다고 보도됐는데 얼마 후 그것이 오보로 드러나면서 매우 혼란스웠다. 

그전에는 언론의 보도는 모두 맞는 줄 알았는데 세월호를 겪으면서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됐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우선 크다. 나중에 어른이 되면 세월호 참사가 있었다는 걸 잊지 않고 어린 세대가 나쁜 경험을 하지 않도록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속상해 울던 선생들...안전문제 화두 던져”

회사원 정재윤(23)=“고등학교 때였다. 당시 친구와 버스를 타고 밥을 먹으러 가고 있었는데 라디오 뉴스로 사고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전원 구조라고 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얼마 후 밥을 먹고 있는데, 전원 구조가 오보라는 속보를 봤다. 그러면서 TV에서 배가 뒤집히는 장면이 나왔다. 당시 단원고에 아는 친구들이 있던 동료들이 학교에 많았는데 그들이 친구들에게 전화하면서 많이 울던 기억이 난다. 내 기억으로 애들(세월호 피해자들)이 나보다 2살인가 어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가 딱 고등학교 수학여행 시즌이었다. 

사건이 있고나서 학교도 비상이 걸려 수학여행이 다 취소됐다. 또 학교에서도 단원고랑 상관이 없는 교사들이 울 때도 있었다. 직업의식 때문이었는지 수업 중에 잠시 쉬는 시간이 있었는데 ‘너희 세월호 봤느냐’고 물어보시다가 속상해 우시는 선생들도 있었다. 생각해보면 세월호라는 사건이 우리 나라에 큰 화두를 던진 것 같다. 큰 사건이었고 이후에 안전문제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고민해보던 시간이 됐던 것 같다. 당시 고등학생이라 더 크게 다가왔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처음 구조될 줄 알아...세월호는 지키지 못한 어린 동생”

외국계 회사원 윤해솔(25)=“저는 대학생이었고, 그날은 오전 수업이 없었어요. 집에서 노트북으로 과제를 하고 있는데 세월호가 좌초됐다는 기사를 봤어요. ‘요즘 같은 세상에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죠. 육지에서도 가까우니 당연히 전원 구조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등교해 수업을 듣고 밥을 먹고, 언제나처럼 평범한 하루를 이어가고 있었죠. 그런데 사망자 수가 늘어나기 시작하는 걸 보고 너무 놀랐어요. 사람들은 죽어가는데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절망스러웠습니다. 제 남동생이 세월호 희생자 학생들과 나이가 같아요. 

그때만 해도 어리기만 한 고등학생이었는데 남동생은 어느새 어엿한 성인이 됐어요. 그래서인지 세월호 관련 기사가 나올 때마다 ‘그 아이들도 살아있었으면 이렇게 컸겠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세월호는 저에게 지켜주지 못한 어린 동생이에요. 

잊지 않는 것이 남겨진 숙제라고 생각해요. 세상을 떠난 동생들, 선생들, 일반인 희생자들을 잊지 않는 것. 한 사람이 세상을 바꾸긴 힘들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맡은 역할을 해내며 묵묵히 그들을 기억하는 것이 더는 이런 참사가 발생하지 않게끔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살아 있다면 많은 걸 할텐데...정치 이용은 안돼”

회사원 윤덕진(26)=“처음에 전원구조라는 뉴스를 보고 흔한 뉴스인 줄 알고 신경을 안썼다. 나중에 오보라는 게 뜨고 충격을 먹었다. 학교에서도 뭔가 정치적으로 시끄러운 게 아니라 정말 어린 친구들이 가슴아픈 사고를 당한데 대해 난리가 났다. 

특히 배가 뒤집혀 바다로 가라 앉는 장면이 실시간으로 방송이 돼 정말 가슴이 아팠던 것 같다. 사실 살아 있었다면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고 더 행복한 삶을 살수 있었을 건데. 세월호는 그후 몇년간 크게 시끄러웠던 사건이다. 누가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우리 대학생들이나 젊은 친구들에게는 큰 충격을 던졌다. 

세월호 이후 안전 문제나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게 된 것 같다. 다만 세월호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건 문제라고 생각한다. 아직 못다핀 친구들이 안타까운 사고를 당하고 향후에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국가가 나서서 구조적으로 안전시스템을 다시 적립하는 기회가 돼야한다.”

◆“의경으로 방패 들어...상처와 충돌은 진행형”

극작가 임진현(29)=“참사 당시 의무경찰로 군 복무 중이었다. 배가 점차 기울어지는 시각에는 서울 삼성동 강남경찰서 방범순찰대 3소대로 갓 전입한 막내 대원으로서 부대 내 사역을 하고 있었다. 소식을 접하곤 해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고라 생각했고, 탑승객 전원이 무사히 구조되기만을 바랐다. 참사 이후 군 생활 절반을 세월호 관련 집회 및 시위를 관리하며 보냈다. 

불쌍한 피해자들과 유가족들, 수많은 방향으로 빗발치는 사회 구성원들의 목소리, 소통 없는 정부, 소요사태 방지를 위해 앞장선 경찰 등이 다양한 양상으로 충돌했다. 4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사회에 남은 상처는 깊다. 충돌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지난 4년의 ‘세월’을 겪은 사회에 과연 내가 제언할 자격이 있는지 되묻곤 한다. 참사 당시 나는 피해자의 슬픔을 공감하면서도 (의무 경찰로서) 방패를 들어 무능했던 정부를 보호했던 ‘박쥐’ 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사회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확실한 보탬이 되고 싶다. 다시는 이런 참사가 벌어지지 않도록 지금 있는 이 자리에서, 극작가로서 최대한 노력하겠다고 다짐한다.”(→내일도 계속)

김건호·김용출·김지연·이동수·하정호 기자 scoop3126@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