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김기자의 현장+] "수치심·좌절감을 생각하면 소름돋죠"..툭하면 터지는 재벌 2·3세 '갑질'

'땅콩 회항'에 이어 '물벼락 갑질' / 기업 오너의 갑질은 한국에서는 흔한 일 / '갑질' 논란 제대로 된 처벌조차 없어 / 피해자가 겪는 고통은 상상 이상 / 심지어 외신에서도 갑질·재벌이라는 단어를 설명 / 재벌들은 특수 신분으로 착각 / 제도적 개선과 법치주의 정착 / 인격 모독은 그만 돼야

지난 19일 새벽 4시 30분쯤 서울 노량진 한 학원 계단. 불 켜진 계단에는 공시생들 빼곡히 앉아 책을 보고 있다. 일찍 온 순서대로 계단에 앉아 책을 보고 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을 알 필요 있을까요? 우리같은 서민들은 없는 죄가 크죠. 없으면 인격조차 무시당하는 거죠. 부모 잘 만나 힘든 세상을 살아보지 못한 사람들이 뭘 알겠어요. 그런 사람들은 잠깐의 비난만 넘기면 된다고 생각하겠죠. 달라진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차녀 조현민(35) 대한항공 광고담당 전무가 광고대행사 직원에게 소리를 지르고 물이 담긴 컵을 던진 것으로 드러나 '물벼락 갑질 논란'이 파문이 확대되고 있다.

지난달 조 전무는 대한항공 공항동 본사에서 자사 광고를 대행업체와 광고 관련 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조 전무는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대행업체 광고팀장에게 소리를 지르고 얼굴을 향해 물을 뿌린 것으로 알려졌다.

파문을 막고자 조 전무는 페이스북을 통해 "어리석고 경솔한 제 행동에 고개 숙여 사과드린다"며 "어떤 상황에서도 해선 안 될 행동으로 더 할 말이 없다"고 자세를 낮추며 사과했지만, 대중의 분노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2014년 12월에는 조현아 당시 대한항공 부사장이 미국 뉴욕 JFK국제공항에서 대한항공 여객기에 탑승했다가 승무원의 땅콩 제공 서비스를 문제 삼아 이륙 준비 중이던 여객기를 램프 리턴(탑승게이트로 되돌리는 일)하도록 지시하고 사무장을 강제로 내리게 했다. 일명 '땅콩 항공'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됐다.
지난 19일 새벽 4시 30분쯤 서울 노량진 한 학원 앞 보행로에는 수험생들이 간판등에 의지한 채 문이 열리기를 기다라며 책을 보고 있다.

대한항공 조현민 전무의 '물벼락 갑질' 파문이 총수 일가로 번지고 있다. 조현민 전무의 어머니인 이명희 일우재단 이사장에 대한 '갑질' 논란이 불거지자 경찰이 내사에 착수했다.

한진그룹의 회장의 장녀 조현아 이어 차녀 조현민까지 구설에 오르면서 재벌 2·3세들의 비도덕적 행태. 감정조차 억제하지 못한 채 사소한 것까지 문제 삼는 재벌 2·3세들의 분풀이 일명 ‘갑질’ 행태는 대중들의 공분을 사고 있다.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셋째 아들 김동선 씨가 폭행 혐의. 두정물산 대표의 아들 임범준씨와 동국제강 장세주 회장의 장남 장선익 이사가 항공기와 술집에서 난동을 피우다 경찰 입건. 정일선 현대BNG스틸 사장, 이해욱 대산업 부회장의 운전기사 '폭언·폭행' 사건, SK재벌가인 최철원 전 M&M대표의 '맷값 폭행' 사건. 문제는 이들의 ‘갑질’은 제대로 된 처벌조차 받지 않는다는 것.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박창진 사무장부터 수많은 피해자는 오히려 회사를 그만두거나 자취를 감췄다.

‘땅콩 회항’의 조 전 대한항공 부사장은 기존에 대표이사로 지내던 칼호텔의 사장으로 복귀했다. 재벌들은 사건이 터질 때마다 사과와 윤리경영을 약속했다. 경영능력은 물론이고 윤리의식과 도덕성을 의심케하는 재벌가 2·3세의 '갑질'에 더해 기업 오너가라면 부와 경영을 당연히 대물림받는 국내 재벌들의 가업 승계와 지배구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대중에 신뢰를 훼손시키면서 더 강한 분노와 불신으로 돌아왔다.
지난 19일 새벽 4시 30분쯤 서울 노량진 한 학원 계단. 일찍 온 순서대로 계단에 앉아 책을 보고 있다.

일명 ‘금수저’를 넘어 ‘다이아몬드 수저’로 ‘후후~’ 불면 부서진다는 ‘흙수저’로 비유되는 서민 청년층의 불만과 박탈감은 극에 달하고 있다.

지난 19일 새벽 서울 노량진 공무원 학원가를 찾았다. 지하철 1호선 노량진역 앞, 왕복 8차선 도로를 따라 빼곡히 들어선 공무원 시험 준비 학원. 1km에 걸쳐 늘어선 학원 건물과 자극적인 문구로 시선을 사로잡는 포스터가 곳곳에 눈에 띄었다.

새벽 4시 30분쯤 노량진 한 학원가 계단. 불 켜진 계단에는 수험생들 빼곡히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일찍 온 순서대로 앉아 눈을 비비며 책을 보고 있었다. 어떤 이는 신문지를 깔고 어떤 이는 방석을 깔고 앉아 문이 열릴 때까지 쭈그려 앉아 두꺼운 책을 보고 있었다. 긴 줄은 학원계단에서 넘어 어두운 보행로까지 이어졌다.

4시 50분 노량진 버스정류장. 방석을 든 공무원시험준비생(공시생)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뛰기 시작했다. 뛰는 수험생 따라갔다. 골목까지 이어진 긴 줄을 보고 허탈해했다. 수험생들은 간판등과 가로등을 의지한 채 문이 열리기를 기다라며 책을 보고 있었다. 화장 없는 얼굴, 고무줄로 머리를 묶은 여성, 운동화·추리닝 등 편한 옷을 입고 있는 수험생 등 다양했다.

새벽 4시부터 노량진 학원가의 풍경이다.
지난 17일 오후 서울 중구 시청역 대한항공 서소문 사옥.

공시생 김 모(30) 씨는 “공무원 준비하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기업보다 안정적인 공무원이죠”고 말한다. 이어 “지금 고생은 미래를 위해 준비한다고 보면 됩니다”고 말한다.

대학 입학하자마자 학교 휴학한 김 모(21) 씨는 “부모님도 반대하지 않습니다. 할 수 있으면 하라고 외환위기부터 지금까지 고생한 것 생각하면. 안정적 일자리 찾을 수 있으면 찾으라고 합니다”고 했다.

한국의 청년실업률이 고공행진을 한다는 사실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다른 선진국이 회복세를 보일 때 한국 청년 취업난은 개선 조짐이 좀처럼 나타나지 않고 있다.

지난달 2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한국의 작년 15∼24세 청년실업률은 10.3%로 전년보다 0.4%포인트(p) 하락해 5년 만에 소폭 하락했다. 한국의 청년실업률은 2012년 9.0%, 2013년 9.3%를 기록한 이후 2014년 10.0%를 기록해 처음으로 10%대에 접어들었다. 이후 2015년 10.5%, 2015년 10.7%를 기록해 꾸준히 상승하다 올해 상승세가 꺾인 것이다.
지난 17일 오후 서울 중구 시청역 대한항공 서소문 사옥 태극 마크. 태극 마크는 1984년 태극무늬 사이에 비행기 프로펠러 모양을 넣어 허가를 받았다. "대한항공에서 '대한' 이라는 문구와 태극 마크를 떼어 주세요." 조현민 대한항공 전무의 '갑질' 논란이 커지면서 청와대 홈페이지에는 국민청원이 잇따라 올라오고 있다.

우리나라의 공무원시험준비생(공시생) 규모가 약 44만 명으로 추정됐다. 공시생의 54.5%는 공무원시험을 택한 이유로 '직업 안정성'을 우선으로 꼽았고, 48%는 '하루 10시간 이상' 공부한다고 답했다. 공무원 공개채용 경쟁률은 경쟁률이 30:1에 달할 정도로 치열하다. 하지만, 대기업을 그만두고 노량진에서 공무원 준비하는 공시생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만큼 인기는 높아가고 있다.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둔 2년 차 공시생 장 모(31) 씨는 “회사 생활해 보면 알죠. '갑질' 당하면 수치심과 인격적 모멸감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좀 더러운 꼴 안 보고 사는 게 소원입니다”라고 딱 잘라 말했다.

전문가에 따르면 “뿌리 깊은 수직 문화, 재벌들은 자기가 누리는 것을 하나의 특수 신분으로 착각하며 규범을 지키지 않는다”고 했다. 이어 “재벌가 자제들에 대한 솜밤망이 처벌은 악순환만 반복시킬 뿐이다. 가족경영이란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가 뿌리 뽑힐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글·사진=김경호 기자 stilcut@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