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의 상징인 황진이는 조선조 여인으로서 보기 드물게 자기주체성을 확립하며 살았고 시문과 가창에 능했으며 명편의 시조 몇 수가 남아 지금도 사람들의 찬탄을 자아낸다. 황진이가 고승 지족선사를 파계시켰다는 설화나 황진이의 무덤에 잔을 올리고 시를 바친 당대의 문사 백호 임제가 파면됐다는 고사를 비롯해 그 주변에 거느린 예화들이 자못 풍성하다. 우리가 이를 기억하는 것은 황진이를 소재로 한 소설 때문이다.
김종회 경희대 교수 문학평론가 |
홍석중은 북한 최고의 작가로 일컬어진다. 그 가계도 심상치 않다. 증조부는 대한제국의 관리였다가 경술국치에 자결한 홍범식이고, 조부는 ‘임꺽정’을 쓴 벽초 홍명희다. 벽초가 6·25전쟁이 끝난 후 월북해 북한에서 활동하는 동안 그의 아들이자 저명한 국어학자였던 홍기문은 북한이 자랑하는 ‘리조실록’ 편찬의 책임을 맡았다. 홍석중은 이 학술과 문학의 혈통을 이어받았고 황진이 이외에도 대하소설 ‘높새바람’을 비롯한 많은 작품이 있다. 그가 쓴 ‘황진이’는 남한 작가들이 쓴 같은 소재의 소설과 이야기 구도가 다르다. 이 소설에 중심인물로 등장하는 ‘놈이’는 황진이의 정인이자 가장 하층계급의 하인이다.
이를테면 황진이의 사랑과 예술과 남성 편력에 초점을 두지 않고 사회주의적 세계관을 조선 중기를 살았던 한 기녀의 삶에 부하한 형국이다. 세간의 화제가 됐던 것은 그와 같은 관점의 특정이 아니라 이 소설이 그동안 북한 문학에서 볼 수 없었던 성애 장면을 사뭇 농밀하게 묘사했다는 점이다. 동시대 남한 소설에 비하면 초보 단계라 할 수 있겠으나 북한 문학으로서는 크게 놀랄 형편이었다. 이와 관련해 모 신문과 인터뷰를 하는 자리에서, 나는 북한 문학에 이러한 표현의 자유가 조속히 확장돼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한국 문단에서는 이 작품을 높이 평가해 만해문학상 수상작으로 결정하기도 했다.
홍석중은 이 소설을 150번이나 고쳤다고 술회했다. 이러한 변화는 1980년대부터 선보이기 시작한 ‘사회주의 현실주제’에 입각한 것이지만, 북한 문학은 여전히 1967년 이래의 주체문학이 완강한 성채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거대한 제방이 무너지는 것도 작은 틈새의 균열에서 말미암지 않는가. 그러한 기대로 모처럼 불어닥친 남북 간의 봄바람에 문화와 문학의 변화가 그 행보를 효율적으로 부양했으면 좋겠다. 개성과 황진이와 홍석중을 함께 떠올려보는 것은 남북 공동의 연락사무소가 들어설 자리에 이들이 함께 얽혀 있는 까닭에서다.
김종회 경희대 교수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