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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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홍식의세계속으로] 생존을 위한 영국왕실의 변화

해리 왕자·마클 결혼식에 축제 분위기 / 인종·문화적 다양성 품은 ‘온고지신’

오는 19일 윈저성에서 치러질 영국 해리 왕자와 미국 여배우 메건 마클의 결혼식에 영국이 온통 축제 분위기다. 해리는 국민의 사랑과 인기를 누리다 비극적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왕세자비 다이애나의 아들이다.

 

12세에 어머니를 잃은 해리는 다이애나에 대한 국민의 애정을 자연스럽게 물려받았다. 해리가 사고를 치거나 기이한 행동으로 튀어도 사람들은 동정심과 넓은 이해심을 발휘했다. 그는 꽉 막히고 답답한 로열패밀리의 틀에서 벗어나는 사람냄새를 풍기는 왕자로 비쳐지기도 했다. 경직된 매너의 왕족에 비해 해리는 쉽게 사람들과 어울리는 성품을 가졌기 때문이다.

 

해리는 왕세자 찰스의 둘째 아들이라 왕위계승과는 거리가 멀다. 게다가 형인 윌리엄 왕세손이 슬하에 2남1녀를 두고 있어 해리가 향후 국왕이 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래도 해리는 국민의 관심과 애정을 한몸에 받으며 영국 왕실에 대한 사회의 사랑과 지지를 새롭게 이끌어낼 것이라는 기대를 낳고 있다.

 

해리가 아내로 선택한 여성은 대서양 건너 미국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배우다. 마클은 미국인인 데다 이혼경험도 있고 흑인 어머니를 두었다는 점에서 큰 관심의 대상이다. 보수적인 왕실 결혼의 관습에 비춰보면 놀라운 배우자의 선택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왕실이 아닌 현대 영국 사회의 기준으로 보면 아주 평범한, 그래서 많은 사람이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대상이다.

 

2014년 통계에 따르면 16세 이상 영국인의 경우 결혼해 사는 사람은 47%에 지나지 않는다. 일부는 여전히 결혼을 하지만 이혼이나 재혼도 많고, 또 혼자 살거나 자유롭게 동거하며 아이도 낳는다는 말이다.

 

인종별 분포를 보면 영국 인구의 89%가 백인이며, 나머지 11%는 흑인, 아시아인 등 다양한 인종이 있다. 수도 런던의 백인 비중은 64%에 불과하다. 또한 백인 안에서도 과거 캐나다, 뉴질랜드 등 영국 식민지나 유럽 대륙 출신들이 상당수다. 현대 영국 사회는 이렇게 인종적, 문화적으로 이미 다양성을 품고 있다. 마클은 영국 왕실에 사회의 다양성 이미지를 더해 지지의 폭을 넓혀줄 수 있는 선택이다.

 

일부에서는 마클의 강한 페미니즘이 왕실의 정치적 중립의 전통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고 염려한다. 마클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여성 혐오자’로 비난한 바 있으며, 아프리카와 인도 등지에서 여성 해방을 위한 캠페인에 적극 참여해 왔다. 정치적 쟁점을 피하고 외교적인 미소와 중립성을 중시하는 영국 왕실의 전통과 부딪칠 수 있는 부분이다. 향후 행보를 지켜볼 일이다.

 

미국, 프랑스 등 평등의 젖을 먹고 자란 공화국 시민들은 영국의 군주제라는 봉건적 잔재를 못마땅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혁명적으로 세상을 단숨에 뒤집어버리기보다는 점진적으로 바꿔가는 개혁 성향은 영국만의 전통이다. 1000년이 넘는 군주제의 역사를 자랑하지만 가장 먼저 군주의 권한을 제약한 의회 민주주의의 나라가 영국이다. 영국의 양대 정당인 보수당과 노동당은 19세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번 왕실의 결혼도 영원히 생존하기 위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영국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영국은 명실상부한 온고지신(溫故知新)의 나라다.

 

조홍식 숭실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