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미국 워싱턴 한·미 정상회담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한 비핵화에 대한 입장을 보다 구체적으로 밝혔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CVID)’와 보상 조치가 한꺼번에 이뤄지는 일괄 타결을 하면 체제안전을 보장하고 한국과 같은 경제적 번영을 이루도록 대폭적 지원에 나서겠다는 것이다. 일괄 타결과 관련해 “아주 짧은 시간이 걸릴 수 있다”고 여지를 남겼다. ‘일괄타결식 초단기 비핵화’를 골자로 한 ‘트럼프 모델’의 밑그림을 제시한 것이다.
공은 북측으로 다시 넘어갔다. 한·미가 세부적인 북한 비핵화와 체제안전 보장 방안 등을 협의해 북·미 간 물밑 대화나 남북정상 핫라인을 통해 북한에 제시하는 절차를 밟을 공산이 크다. 북한은 이를 적극 수용해 비핵화와 관련한 진정성 있는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4·27 판문점선언을 행동으로 실천할 수 있는 길이다.
한·미의 대북 공조가 중요한 때인데 양국이 다소 시각차를 드러낸 것은 우려를 낳는다. 다음달 12일로 예정된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은 “조건들이 충족되지 않으면 회담은 열리지 않거나 연기될 수 있다”며 북한을 압박했다. 반면 문재인 대통령은 “북·미 정상회담 개최에 대한 북한의 의지를 의심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납득이 되지 않는다. 중국 뒷배를 믿고 생트집을 잡는 북한의 행태를 보고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북한이 남북정상회담에서 약속한 대로 정말 ‘완전한 비핵화’를 실천할 의지가 있다면 이런 식의 행동을 보이진 않을 것이다.
북한은 금명 단행할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행사에서도 남한 취재진을 어제 뒤늦게 받아들였다. 남측의 애를 태우다가 막판에 ‘통 큰 조치’로 시혜를 베푼 듯한 모양새다. 북한의 전형적인 대남 술수이다. 더구나 당초 약속과는 달리 폐기 행사에 전문가들은 한 명도 부르지 않았다. 10년 전 영변 원자로 냉각탑 폭파 때처럼 국제사회에 ‘비핵화 쇼’를 벌이려 한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북한은 앞서 한·미 연합훈련 등을 트집 잡아 남북고위급회담을 일방적으로 취소하고 집단 탈북한 종업원들의 송환을 요구했다.
이런 일방적 갑질은 우리가 자초한 측면도 없지 않다. 지난달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이후 정부가 지나치게 북한 눈치를 보는 듯한 인상을 준다. 문 대통령을 수행한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북한 측 입장에서 우리가 좀 이해하는 방향으로 고민하고 있다”고 되레 두둔했다. 국책연구기관인 통일연구원이 2018년 북한인권백서를 펴내고도 예년과 달리 보도자료조차 내지 않았다. 북한이 인권문제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니 그런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온다. 게다가 정부는 핵 담판을 시작하기도 전에 대북 지원 등 ‘당근’ 제시에만 골몰한다.
북한의 겁박에 설설 기는 저자세로 어떻게 완전한 비핵화를 하겠다는 것인가. 대북제재를 피하기 위한 북한의 대남 압박 공세는 앞으로 더욱 거칠어질 것이다. 말과 행동이 다른 북한에 번번이 당하는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우리의 자세부터 달라져야 한다.
[사설] 북·미 중재 필요하지만 北 갑질에 끌려다녀선 안 된다
기사입력 2018-05-24 00:11:08
기사수정 2018-05-24 00:11:08
기사수정 2018-05-24 00:11:08
트럼프 “일괄타결식 비핵화” / 文대통령 “북한 의지 의심 안 해” / 대북 경각심 늦추지 말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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