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간호사) 선생님밖에 없어요.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있어 좋지 않은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있었어요.”
서울시 도봉구에 사는 김모(30·여)씨는 10평 남짓한 집에서 아이 5명을 키우고 있다. 일곱 식구의 생활물품만으로도 집안은 꽉 찬다. 10살짜리 첫째부터 지난 4월 태어난 막내까지 자녀 5명이 비좁은 공간에서 오밀조밀 붙어 지낸다. 그래도 김씨는 “이전보다 거주환경이 나아져 마음이 편하다”며 웃었다.
지난해까지만 하더라도 김씨 가족은 반지하 단칸방에서 지냈다. 김씨는 자녀들을 돌보느라 집에 매여 지냈다. 남편마저 발목을 다쳐 일을 쉬었다. 그의 가족은 기초생활수급자도 아니었다. 설상가상으로 지난해 여름 장맛비에 집이 물에 잠겨 거리에 나앉을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김씨 가족은 희망의 끈을 놓지는 않았다. 부부를 도와주는 사람들 덕분이었다. 김씨가 다섯째 아이를 가졌을 때 철분·엽산제를 받으러 보건소에 들르지 않았더라면 붙잡지 못했을 행운이었다.
도봉구보건소는 만 0∼2세 영유아가 있는 모든 가정에 간호사의 방문서비스를 제공하는 ‘서울아기 건강 첫걸음 사업’(서울아기)을 실시하는 자치구였다. 보건소는 김씨에게 임신부 등록을 권유했다. 김씨는 우울증 진단 설문조사에서 자해 가능성이 높은 고위험 임신부로 나타났다. 이로써 김씨 가정이 간호사들에게 ‘발견’된 것이다.
간호사와 사회복지사는 이렇다 할 소득이 없는 김씨 부부가 기초생계비를 받을 수 있도록 발벗고 뛰었다. 부부는 반지하 방의 월세를 두 달간 내지 못한 상태였고, 아이들을 제대로 챙겨먹이지 못했다. 김씨는 경제적인 어려움과 양육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었다.
기초생활수급자 등록으로 한 고비를 넘기자 부부에게 또 다른 시련이 찾아왔다. 다섯째 아이가 ‘알라질 증후군‘이라는 희귀 난치병을 앓고 있음을 알게 됐다. 희귀 난치병은 진단을 받으면 건강보험 지원 대상이 되지만 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개인이 비용을 모두 부담해야 한다.
김씨 부부는 의료비를 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사정을 들은 서울아기 간호사와 사회복지사, 도봉구 사회복지사 3명이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김씨 부부가 주저앉지 않도록 도왔다.
◆산후관리서비스 서울시 유일…국가 서비스 없어
만약 김씨가 서울시가 아닌 다른 지역에 거주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김씨가 보건소에 철분제를 받으러 간 날 약품만 손에 받아들고 돌아왔을 가능성이 높다. 어려운 사정이 알려져 다행히 센터에 연계됐더라도 몇 번 상담을 받는 것에 그쳤을 것이다.
그에게는 어려움을 호소할 부모도, 친구도, 이웃도 주변에 없다. 낯가림이 심해 밖에도 잘 나가지 않는다. ‘외딴 섬’에 고립된 채 혼자 전전긍긍하며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 상황에서 아동학대가 벌어지고 비극적 사건이 일어날 때에야 이들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을지도 모른다.
서울시와 같은 서비스가 전국적으로 시행되고 있다면 어떨까? ‘서울아기 건강 첫걸음’ 사업은 만 2세 이하 아이를 키우는 서울시 주민이라면 누구나 신청할 수 있는 산후 건강관리 서비스다. 별로 문제가 없으면 1회 방문으로 끝나지만, 산모에게 우울증이 있거나 지속적인 부모교육이 필요한 경우 간호사가 2년간 정기적으로 방문한다.
김씨처럼 임신 중에 고위험군으로 분류된 산모는 출산 전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영국과 호주, 미국 등 많은 국가에서는 아동의 첫 출발을 지켜보고 지원하기 위해 이러한 서비스를 도입해 시행 중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정부 차원의 서비스 제공은 없다. 서울시를 제외하고 비슷한 사업을 수행하는 지방자치단체도 없다. 서울이냐 아니냐에 따라 산모와 아이가 누릴 수 있는 권리와 혜택에 큰 차이가 나는 셈이다. 서울시조차 홍보 부족과 인력·예산상 한계로 지난해 서비스 이용률은 24.5%에 그쳤다.
서울아기 건강 첫걸음을 통해 간호사의 방문서비스를 받고 있는 서울시 도봉구의 김모씨가 아이의 건강상태를 김선현 간호사에게 묻고 있다. |
결국 김씨의 다섯 번째 아이는 생후 1년 만에 숨을 거뒀다. 김씨는 그 사이 임신해 현재 또 다른 다섯 번째 아기를 돌보고 있다. 잃어버린 아이를 대신한 아이라서 더욱 잘 기르고 싶어했다.
“지금 아기는 건강해 분유를 적당히 줘야 하는데, 전에 애가 먹지 않던 모습이 떠올라요. 지금 이 자리에, 똑같은 아기 침대에 이 아이가 누워 있는 걸 보면 그 아이가 계속 떠올라요. 슬퍼할 시간조차 갖지 못해 더 힘들어요.”
김씨의 호소에 간호사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같이 지적하고 비난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 아이에게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산모도 이미 알고 있다. 조금씩 노력하면 된다”며 김씨의 양육 태도를 지지하고 올바른 양육 방식을 간접적으로 알려주었다.
김씨 가족은 떠난 아이로 인해 모든 구성원이 고통을 받았다. 특히 올해 초등학교 1학년이 된 둘째 딸이 심리적으로 어려워했다. 딸아이는 조금만 건드려도 극심하게 짜증을 냈다. 학교에서 시행한 우울증 검사에서 고위험군으로 나타났다.
“다른 아이들은 떠난 아기에게 편지를 쓰며 울기도 했는데, 이 애는 슬픔을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어요. 다만 점점 말수가 줄었고 짜증이 늘더라고요.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한데 말을 안 해요. 상담을 받고 싶지만 어디에 가서 뭘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사회복지서비스는 여러 기관에 분산된 데다 절차가 복잡해 정작 도움이 필요한 가정이 이용하지 못하는 사례가 많다. 다행히 김씨에게는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간호사가 있었다.
그를 담당하는 김선현 간호사는 “다음 번 방문 전까지 주민센터와 육아종합지원센터 등에 확인해 가족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연계해주겠다”고 말했다.
김 간호사는 “김씨가 자녀를 많이 낳은 데는 외로움이 깊었던 어린 시절과 외부와 단절된 현재의 고립감이 큰 영향을 미쳤다”며 “어려운 환경에서도 아이들을 잘 키울 수 있도록, 아이를 잘 돌보고 싶어하는 마음을 잃지 않도록 지지해 주는 게 제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이현미 기자 engine@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