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오르던 신자가 농담을 섞어 한 이 말, 그리고 세상을 떠난 지 한 세기를 훌쩍 넘긴 지금도 해월의 말과 행동을 기억하고 되새기기 위한 참례식에 참석하려고 200여명이 산속을 오르는 그 풍경은 해월의 파란만장했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것이었다. 올해는 해월이 순도(殉道)한 지 120년이 되는 해다. 그는 1898년 4월 5일 강원도의 원주에서 관군에 체포됐고, 두 달 정도가 지난 6월 2일 한성의 감옥에서 처형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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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경기도 여주의 천덕산 산중에 자리 잡은 해월 최시형의 묘소에서 그의 순도 120주년을 기리는 참례식이 열려 천도교 신자들이 참배를 하고 있다. |
‘사람을 하늘처럼 여기라’는 해월의 가르침은 강고한 신분질서와 교조화된 성리학을 사회질서의 기반으로 하던 조선에서 수용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가 칼날 같은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자신을 잡아들이려 혈안이 된 관군을 피해 해월은 방방곡곡을 떠돌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부조리한 세상을 향한 외침을 멈추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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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4월 최시형이 체포될 당시 머물렀던 강원도 원주시 고산리의 원진여 집이 복원돼 답사객들이 둘러보고 있다. |
‘인시천(人是天)이니 사인여천(事人如天)하라’는 천도교의 핵심 교리를 전한 곳이 이 마을에서였다. 천도교중앙총부 정정숙 사회문화관장은 “아녀자의 말이라도 공경히 듣고, 아이를 때리지 말라는 구체적인 가르침을 포함한 것이었다”며 “함부로 나무를 꺾지 말고, 새소리도 한울님의 소리로 여기라고 했으니 생태계의 중요성을 그때에 벌써 강조한 것”이라고 말했다. 천도교의 역사가 집약된 곳이고, “이런 역사를 잘 알릴 수 있는 스토리텔링을 개발해 나가겠다”(이장 윤경섭씨)고 계획하고 있지만 갈 길은 멀어보였다. 유적비 말고는 마을과 해월의 인연을 알려주는 것이 변변히 없고, 호굴은 말 그대로 산중에 있어 주민들조차 접근이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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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 최시형이 1년 정도 숨어 살았던 강원도 영월군 직동2리에 유적비가 세워져 있다. |
원주시 호저면의 고산리는 해월의 사상을 계승하려 한 이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곳이다. 고산리 앞을 지나는 도로가에 세워진 추모비는 생활협동조합 한살림을 만든 생명·사회운동가인 무위당 장일순 선생이 1990년 세운 것이다. 추모비에는 ‘모든 이웃의 벗 최보따리 선생을 기리며’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작은 보따리를 가지신 행장(行裝)으로 방방곡곡을 찾아 민중에게 겨레의 후천오만년(後天五萬年)의 대도(大道)를 설(說)하시고…동고동락하셨기에 민중들이 선생님을 부르던 애칭”이라고 해월의 별명 ‘최보따리’에 대한 설명을 해두었다. 김용우 무위당 만인회 기획위원장은 “장일순 선생이 평생의 스승으로 꼽았던 세 분 중의 한 명이 해월”이라며 “해월의 말씀을 떠올리며 생명운동을 시작했고, 수운과 해월로 이어지는 사상으로 장일순 선생은 자주적 근대화의 길을 모색했다”고 설명했다. 고산리에 추모비를 세운 것은 여기서 해월이 관군에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머물던 마을 주민 원진여의 집이 복원돼 당시의 상황을 간접적으로나마 전하고 있다.
천도교는 해월 순도 120주년을 맞은 올해, 다양한 행사를 계획하고 있다.
참례식에서 만난 천도교 최고지도자 이정희 교령은 “수운 대신사가 천도교를 연 아버지 같은 존재라면 해월 신사는 천도교의 터전을 닦은 어머니였다”고 평가하며 “평등을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흔히 링컨을, 비폭력을 말할 땐 간디를 떠올린다. 평등을 몸소 실천했고, 비폭력의 성자였던 해월 신사를 모르는 현실이 안타깝다”며 말했다. 이 교령은 “올해는 관련 학술대회를 열고, 경주의 생가터를 복원해 민족의 사상을 교육하는 도당으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원주·여주=글·사진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