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여유로울 수 있을까.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 10주년 공연에 참여하는 최재림에게서 심적 부담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공연 중인 이 작품에서 그는 처음으로 음유 시인 그랭구아르를 맡았다. 최근 서울 강남구 한 카페에서 최재림과 마주했다. 그는 “연습도 굉장히 마음 편하게, 즐기면서 했다”고 담담히 말했다.
사실 그랭구아르는 만만치 않은 배역이다. 첫 곡 ‘대성당들의 시대’만 해도 하늘로 치솟는 고음을 소화해야 한다. 새 천년의 도래를 웅장하게 선언해야 하니 큰 성량도 필요하다. 뮤지컬의 포문을 여는 곡이라 자칫 삐끗하면 공연 전체 인상을 구길 수 있다.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에서 그랭구와르를 맡은 배우 최재림은 이 인물의 매력으로 “사회자이면서 수시로 극에 개입하기에 관객에게 전지적인 존재, 신처럼 보이기도 하고 이 극을 써내려가면서 이야기하는 작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며 “그러니 공연 중에 도드라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남정탁 기자 |
‘어려우니 좀 봐 달라’며 몸을 사리는 게 편할 텐데, 그는 오히려 가슴을 활짝 폈다. “배우 자체가 남 앞에 서는 직업인데 이 정도 자신감은 있어야 하지 않겠나”라고 생각해서다. “자신감이 큰 건 제 성격인 것 같다”는 그는 “그렇다고 말만 앞세우지는 않는다”고 못박았다. “‘뭐야, 말만 잘하고 까보니 별거 없네’라는 소리 안 들을 정도로 열심히 노력한다”는 것.
최재림의 무대를 봐온 이들이라면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법하다. 성악과 출신인 그는 남부럽지 않은 가창력을 증명해 왔다. 2015년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의 유다·지저스를 연기하며 고음이 난무하는 록 넘버들을 선보였고, 최근 막 내린 ‘킹키부츠’에서는 여장남자 롤라가 돼 무대를 휘저었다. 자연히 그가 그랭구와르에 발탁된 소식이 전해지자 기대감이 컸다. 특히 ‘노트르담…’은 대사 없이 51곡이 이어지는 ‘성스루 뮤지컬’이라 가창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대참사가 벌어진다. 그러나 최재림은 그랭구와르에 대해 노래의 기술 못지않게 표현·해석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연습 전엔 그도 ‘노래를 잘 불러야지’라고 했다. 생각을 바꾼 계기는 원곡 작곡가의 조언이었다.
“작곡가 리카르도 코치안테가 그러더라고요. ‘다들 (그랭구아르로) 가창력을 보여주려고 하지만, 난 그렇게 곡을 쓰지 않았다. 그 인물이 돼 감정을 쏟아내야 한다. 막상 불러보면 처음 생각보다 쉽지 않을 거다.’ 테크닉도 중요하지만 마음이 우선해야 한다는 거죠. 사실 이 작품에는 단순하고 반복적인 멜로디가 많은 게 함정이에요. ABAB식이에요. ‘대성당들의 시대’만 해도 같은 후렴이 세 번 반복되니, 노래만 부르면 변화가 잘 안 느껴져요. 배우의 색과 해석을 넣어야 해 이를 많이 연구했어요.”
“2009년 그랭구아르로 오디션을 봤는데 똑 떨어졌어요. 그때는 확실히 어렸어요. 엄청 떨었고, 노래할 때 힘이 많이 들어갔어요. (경력이) 쥐뿔도 없었고요. ‘렌트’와 ‘헤어 스프레이’ 두 작품 했을 때라 너무 신인이었죠.”
2016년 다시 기회가 왔다. 그는 “‘클로팽’ 역으로 제안이 와서 오디션 장에 갔는데 ‘제가 그랭구와르도 준비했다’며 같이 불렀더니 다들 좋아하시더라”라고 회상했다. 해외 제작진은 그에게 ‘프롤로, 콰지모도도 불러보라’고 주문했다. 모든 남자 배역을 다 부르고 나니 ‘쟤는 뭘 해도 어울리겠다’는 평이 돌아왔다. 기획사 측과 일정을 조율하는 단계까지 갔지만, 아쉽게도 마음을 접어야 했다. 당시 그가 참여했던 뮤지컬 ‘에드거 앨런 포’와 기간이 겹쳤다.
“세 번째 오디션 만에 된 건데, 이제 저도 배우 생활한지 꽤 돼서 설렘보다는 ‘어떻게 잘해낼까’하는 마음이 앞서요. 2009년에 됐다면 ‘겁나’ 좋았을 거예요. 잘 했을지는 모르겠어요. 노래는 잘했을 텐데, 관객이 봤을 때 과연 그랭구아르로 보였을지는 의문이에요. 연기를 하나도 몰랐을 때라서요. 2016년에 놓친 게 아쉬운 만큼 이번에 원없이 해야죠.”
송은아 기자 sea@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