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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경심 인도주의실천의사협 이사(왼쪽) |
산부인과 진료실에는 다음과 같은 일이 늘 일어난다. 임신 6주라는 진단을 받은 미혼남녀가 의사에게 둘 다 구직 중이고 결혼할 자금조차 없어 아이를 도저히 키울 수 없다고 호소한다. 법적으로 낙태가 불가능하다고 하자 남성이 욕설을 퍼붓고 소란을 피운다. 헤어진 남자친구의 아이를 가진 여성이 뒤늦게 임신 사실을 알고 수술을 해 달라고 애원한다. 넷째 아이를 가진 고령의 산모가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할 때도 있다.
우리 사회는 미혼모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심하다. 법적 부부라 하더라도 임신에 따른 학업·직장생활의 중단과 양육·교육에 드는 경제적 부담 때문에 자녀 출산을 신중하게 결정한다. 이런 환경에서 아이를 키울 수 없는 불가피한 상황에 처한 여성들이 불법을 감수하며 수술을 받고 있다. 형법에 의한 낙태 범죄화가 생명경시 풍조를 차단하거나 낙태를 근절하는 효과는 전혀 없고 오히려 안전하지 않은 낙태를 양산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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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태죄 끝내자’ 여성시민사회단체 회원이 7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 모여 낙태죄 폐지를 촉구하고 있다. 이들은 “건강권을 침해하는 낙태죄를 폐지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행진했다. 뉴시스 |
낙태 시술을 하는 산부인과에서는 비밀유지와 위험 부담을 대가로 고비용을 요구한다. 비용 문제로 안전하게 시술할 수 있는 시기를 놓친 경제적 취약계층과 청소년이 뒤늦게 더 큰 위험을 감수하는 경우도 있다. 낙태와 관련한 한국의 현실을 보면 유엔 인권조약에 규정된 국민의 건강권과 재생산권을 침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국민의 80% 이상이 가톨릭교인 아일랜드는 얼마 전 낙태를 금지한 헌법 조항을 국민투표를 통해 폐지하기로 결정했다. 아일랜드는 불법 낙태에 최고 14년형을 부여한 보수적인 국가였다. 하지만 올해 중 법안을 마련해 임신 12주 이내에는 낙태를 자유롭게 허용하고 12∼14주 기간에는 일부 예외사유에 한해 허용할 방침이다. 가톨릭국가인 아르헨티나에서도 지난 5월 임신 14주 이내에 낙태를 허용하는 법안이 국회 하원에서 통과했다. 낙태 합법화는 세계적인 추세다.
낙태 불법화로는 오남용을 막기 위한 사회정책조차 수립할 수 없다. 한국은 낙태를 범죄화하면서 낙태 상담과 교육, 시술 후 의료서비스 지원이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암암리에 이뤄지는 문제를 방치하며 수많은 여성을 위험에 내몰고 있을 뿐이다. 10대 청소년과 장애인 여성, 경제적 취약계층 여성 등 사회적 약자일수록 건강과 존엄성을 위협받고 있다.
의료기술 발달로 이제는 다양한 낙태 유도 약물이 개발되고 보조생식기술로 배아·태아를 조작하고 선별하는 기술까지 나오고 있다. 이런 시대에 낙태 범죄화는 시대착오적인 조치다. 낙태가 이뤄지는 현실을 보면 형법의 낙태죄가 생명존중 풍토를 만들고 성적 문란을 예방하는 기능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여성 건강을 위협하고 낙태를 줄이기 위한 제도 정비를 가로막고 있다. 낙태 합법화는 생명경시가 아니라 실태 파악을 통해 예방사업을 확대하는 등 생명을 존중하는 출발이 될 수 있다. 형법의 낙태죄 조항에 위헌 결정이 내려지고 여성의 건강과 모성보호를 위한 새로운 입법과 제도가 마련돼야 한다.
정리=이현미 기자 engine@segye.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