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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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자와 만납시다] 곰인형 놨을 뿐인데… 갈등 대신 양보·배려 넘쳤다

대전 지하철 임산부석 눈길 / 2017년 11월 설치 … 시민 호응 좋아 / 안내시트만 붙이는 것보다 효과 / 전국으로 확대 시행하면 좋지만 / 예산 확보·분실 문제 해결 남아
열차 문이 열리자 승객들이 우르르 내리고 탔다. 열차를 가득 메운 인파 속 진분홍색 임산부석이 눈에 띈다. 여기는 지난 9일 대전지하철 1호선 중앙로역이다. 이곳 지하철에는 특별한 하나가 더 있다. 지하철을 운영하는 대전도시철도공사(대전도철)가 지역 여성병원과 홍보협약을 맺고 비치한 일반 성인 머리 크기 정도의 테디베어 곰인형이다. 좌석 한쪽에 앉아 귀여운 자태를 뽐내는 이 인형에는 임산부 배려석인 만큼 양보와 배려 등을 부탁한다는 메시지가 쓰였다.

곰인형이 지나치는 승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옆 좌석에 앉은 이는 곰인형을 마치 강아지인 양 바라봤고, 임산부석 앞에 선 또 다른 승객은 가족을 보듯 따스한 눈길을 건넸다.
대전 지하철 1호선 임산부 배려석에 놓인 테디베어 곰인형.
대전도시철도공사 제공

대전지하철은 열차 한 편당 4량으로 구성된다. 대전도철은 열차 1편당 임산부 배려석 4개를 배치했다. 앞서 2016년 6월 전 역사의 승강장 안전문에 ‘임산부 배려석 설치칸’ 안내 문구가 부착됐다. 같은해 임산부 배지 나눠주기를 비롯한 캠페인이 진행됐는데, 당국과 인구보건복지협회 관계자 등 300명이 참여했다고 한다.

지난해 3월 전동차 바닥에 임산부 배려석 안내 시트를 설치한 대전도철은 같은 해 11월1일 테디베어 곰인형을 캠페인에 동참시켰다. 곰인형은 지하철이 운행되는 시간 내내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 승객들과 말 없이 ‘인사’하는 중이다.

곰인형 캠페인은 서울지하철 9호선이 처음 시작했다. 2016년 10월 임산부의 날(10월10일)을 맞아 곰인형을 비치한 데 이어 지난해 상·하반기에도 전동차 내 임산부 배려석에 방석과 테디베어 곰인형을 놓는 캠페인을 진행했다. 서울시와 이종혁 광운대 교수의 공공소통 프로젝트(LOUD)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9호선 관계자는 설명한 바 있다.

대전지하철에서 만난 승객들은 테디베어 곰인형의 존재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남성 A씨는 “작년에 곰인형이 등장하고 나서 신기했다”며 “시트만 붙이는 것보다 효과가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고교생 B양과 C양은 “진분홍색 의자도 예쁘다”며 “테디베어 곰인형 덕분에 임산부 배려석이 귀엽게 느껴지고 배려해야 한다는 생각도 절로 들었다”고 입을 모았다.

아직 캠페인이 정착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대전도철은 지난 4월 실태를 관찰한 결과 임산부가 아닌 일반 승객이 좌석에 앉은 사례가 25% 정도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물론 어디까지나 배려이므로 이런 승객들을 탓해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한 관계자는 “임산부 배려석에 앉은 일반인 승객은 어르신 대부분이었다”며 “보건복지부, 인구보건복지협회와 힘을 모아 지속해서 안내문을 부착하고 곰인형을 가져다 놓는 방식으로 모니터링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대전도철이 확보한 곰인형은 200여개다. 하루 편성된 21개 차량에 4개씩 모두 84개가 투입됐으며, 지난 6월30일을 기준으로 20여개가 분실됐다. 대전도철 측은 곰인형이 없어지거나 더러워지면 예비품으로 즉시 교체하거나 세탁한 뒤 다시 가져다 놓는다고 한다.

곰인형 비치만으로도 이처럼 배려심을 유발할 수 있었던 것은 ‘넛지(Nudge) 효과’의 원리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넛지는 ‘옆구리를 슬쩍 찌른다’는 뜻으로, 강요에 의하지 않고 유연하게 개입함으로써 선택을 유도하는 방법을 이른다.

‘곰인형을 전국 지하철로 확대하면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쉽지 않아 보인다. 서울 9호선 측은 해마다 2회 정도 캠페인 진행에는 무리 없으나, 상시 배치는 어렵다고 했다. 지하철 1~8호선을 운영하는 서울교통공사도 이런 캠페인을 계획하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전체 노선에 곰인형을 가져다 놓으면 예산에 어느 정도 부담이 될 뿐 아니라 대전에서 발생한 분실문제도 고민일 터다.

김동환 기자 kimcharr@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