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함인희의세상보기] 주 52시간 근무제와 워라밸의 함수관계

가족과 일 중요도 묻는 질문에 / 기성·신세대 간 의견 차이 뚜렷 / '저녁이 있는 삶’이 주는 기회 / 한국적 맥락서 진지한 논의를

3년 전 60세 정년연장 시행을 앞두고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흥미로운 결과가 나타났다. 일과 삶의 균형을 의미하는 일명 ‘워라밸’(워크 라이프 밸런스를 축약한 표현)은 젠더 이슈가 아니라 세대 이슈라는 사실이었다. 다시 말해서 워라밸을 둘러싸고 남녀 간에 첨예한 의견 차이를 보이기보다는 기성세대와 신세대 간의 의견 차이가 보다 뚜렷했다는 말이다.

 

워라밸에 대한 태도를 살펴보기 위해 가족과 일의 중요도 및 비중을 묻는 말에, 기성세대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응답한 비율이 40.8%로 가장 높았고, 다음으로 가족이 중요하다는 응답이 39.1%로 나타난 반면, 신세대로 갈수록 가족이 중요하다는 응답이 41.4%로 가장 높게 나타났고, 일이 중요하다는 응답은 33.9%로 뒤를 이었다. 특히 신세대의 경우는 남녀가 동일한 응답 패턴을 보이고 있음이 눈에 띄었다.

 

함인희 이화여대 교수·사회학

워라밸의 정의 가운데 널리 회자되고 있는 것으로는 국제노동기구(ILO)가 규정한 지침을 들 수 있다. ILO에 따르면 워라밸이란 우리의 삶 속에서 좋은 직업, 훌륭한 부모 역할과 건강한 가족, 자신의 성장을 위한 투자, 이들 세 가지 주요 과업 사이에 균형을 유지해감을 의미한다.

 

워라밸은 1970년대 들어 미국을 중심으로 워킹 맘의 일 가정 양립이 이슈가 되면서 사회적 관심을 끌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성은 생애주기의 특성상 커리어를 다지는 시기와 출산 및 양육을 담당해야 하는 시기가 정확히 일치함에 따라 역할과부하가 걸리게 되는 만큼, 이 시기 일과 삶의 균형을 잡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짐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이후 남성의 경우도 고령화가 진행됨에 따라 은퇴 이후 생애주기에 위기가 닥쳐온다는 사실이 다양한 연구를 통해 입증되기 시작했다. 남성은 은퇴와 더불어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의 사회적 네트워크로부터 단절 혹은 고립을 경험하게 되고, 그동안 일에 몰입하느라 소원했던 가족으로부터 소외됨으로써 가족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으나 정작 가족 안에 자신의 자리는 사라져버리는 딜레마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이다.

 

최근 미국에서 진행된 연구에 따르면 자신이 좋은 아빠라고 인식할수록 자아 존중감 또한 높아진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남성의 삶에서도 아빠로서의 정체성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이 확인된 셈이다. 행여라도 아빠의 무관심이 자녀의 성공 요건 중 하나라는 유머를 믿는다면 그 정당성을 숙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신뢰할 만한 데이터 중 아빠의 무관심 속에서 성장한 자녀 가운데 높은 학업 성취도를 보인다거나 민주적이고 만족스러운 부모·자녀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사실도 참고할 만하다.

 

워라밸이 유지되지 못할 경우 개인 차원에서 느끼는 스트레스와 번 아웃은 쉽게 예상되는 결과인데, 그로 인한 구성원의 결근 등으로 인해 조직 차원에서 치러야 할 비용 부담 또한 만만치 않게 발생하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7월 1일부터 실시되고 있는 주 52시간 근무제를 둘러싸고 주로 고용주의 입장이나 노동시장의 관점에서 현실적 한계와 다양한 문제점이 부각돼온 것은 다소 아쉽다.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 한국적 맥락에서 근로시간 단축이 갖는 의미와 워라밸 사이의 관계에 주목할 필요가 있으리라 생각된다.

 

일과 삶의 균형을 잡는다는 것은 일, 가족, 자신을 대상으로 3분의 1씩 나누어 생애주기 전 과정에 걸쳐 팽팽한 균형을 유지하라는 의미가 아님은 자명하다. 그보다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잘할 수 있는지 탐색하는 데 더욱 집중해야 하는 시기가 있다면, 어느 때는 커리어에 몰입하면서 일의 재미를 만끽하는 시기가 있을 것이요, 또 어느 단계에서는 부모 역할과 가족의 유지에 더욱 신경을 써야 하는 시기도 있을 것이다. 글로벌 기업을 중심으로 어떻게 워라밸을 실천에 옮길 것인지 개인별로 맞춤형 컨설팅을 해주는 전문 인력을 고용하기 시작했음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것이다.

 

특별히 한국적 맥락에서는 일과 가족, 그리고 개인 중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이 자기 자신의 성장과 발전, 재충전을 위한 투자인 듯하다. 기성세대를 중심으로 일중독에 가까운 현상을 보임으로써 명분상으로는 가족을 위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가족과 함께하거나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시간이 거의 부재하는 아빠의 자화상도 해결을 기다리는 과제임이 분명하다. 일을 위해 가족을 기꺼이 희생하는 기성세대를 향해 “일과 개인생활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나는 개인생활이다. 기성세대는 가족과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 모르는 것 같다”고 평가하는 신세대의 비판적 시선도 참고할 만하다.

 

주 52시간 근무제의 도입은 현재로서는 시기상조라는 주장에도 충분히 귀 기울여야겠지만, 그럼에도 ‘저녁이 있는 삶’의 기회가 열렸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작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차제에 일과 삶의 균형을 유지한다는 것이 우리네 삶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띠어야 할 것인지, 솔직하면서도 진지한 논의가 이루어지길 기대해본다.

 

함인희 이화여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