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유력 정치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세계 최고 수준의 자살률 국가의 민낯이 또다시 드러났다. 왜 자꾸 이런 비극이 되풀이될까. 고인에 대한 안타까움이나 정치적인 평가를 떠나 그가 왜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 지를 큰 틀에서 살펴봐야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에 <세계일보>는 전문가들과 함께 우리나라 자살의 구조적인 문제점을 짚어봤다. 체면과 명예를 중시하는 유교적 가치관과 수사당국의 낮은 인권감수성, 자살에 다소 온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미디어 등이 주된 요인으로 꼽혔다.
◆비정상적으로 높은 자살률, 왜?
31일 통계청에 따르면 2016년 기준 우리나라 자살자 수는 총 1만3092명으로 10만명 당 자살률(자살사망률)은 25.6을 기록했다. 하루 평균 35.8명씩, 1시간 마다 1명 이상(1.49명)이 극단적인 선택을 한 셈이다. 자살률이 최고치였던 2011년(자살자 수 1만5906명)보다는 다소 누그러졌지만 1990년(3251명)에 비하면 여전히 문제가 심각하다.
자살은 흔히 경제적인 문제와 연관지어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전문가들은 사회·문화적인 요인이 더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본다. 경제적인 요인만으로는 우리나라의 높은 자살률을 설명하기 어렵다는 거다.
예컨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2015년 기준 자살사망률이 2.6으로 가장 낮은 터키의 경우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9826달러로 우리나라(2만9115달러)의 3분의1 수준에 불과하다. 터키는 소득분배의 불평등도를 뜻하는 지니계수 개선율도 5.9%로 우리나라(11.4%)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IMF 사태’에 버금가는 경제위기를 겪은 그리스 역시 자살사망률이 4.7에 불과하다. 그리스의 24세 이하 청년 실업률은 2013년 한때 64.2%에 달했을 정도로 심각했지만 자살률 상승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삶을 바라보는 태도나 문화적 배경, 자살예방 인프라에 따른 차이라는 분석이다.
백종우 경희대 교수(정신건강의학)는 “자살은 대개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다른 해결 방법을 떠올리지 못한 경우 발생한다”며 “우리나라에서 자살이 문제에 닥쳤을 때 일종의 해법처럼 여겨지고 있는 게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유난히 명예를 중시하는 유교 문화가 문제란 시각도 있다. ‘남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 비롯되는 이른바 ‘한국형 자살’은 노인층에서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2010년 81.9를 기록한 65세 이상 자살사망률은 2016년 53.3으로 줄어들긴 했지만, 터키(3.8), 영국(6.8), 미국(16.6), 일본(25.8) 등에 비해 월등히 높다.
허준수 숭실대 교수(노인복지)는 “자식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심리와 배우자 사망 등으로 인한 고립, 일자리가 없어 사회구성원으로 제대로 역할을 못하는 상황 등이 심각해지면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수사기관 인식부터 바뀌어야”
구속 수사가 주는 중압감이 극단적인 선택을 부추긴다는 분석도 나왔다. 앞서 법원의 구속영장실질심사를 앞둔 정치인과 검사 등 유력인사들의 극단적인 선택이 잇따른 바 있다.
검사 출신인 이창현 한국외대 로스쿨 교수(형법)는 “통상 구속과 관련해 자살 문제가 많은데 구속을 수사 성공의 잣대로 판단하는 관행이 피의자를 압박하고 있다”며 “문명사회에서 구속은 사실상 모든 것을 잃은 것인 만큼 누구나 심리적으로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특히 법원의 최종 판단이 나오기도 전에 ‘범죄자’로 낙인 찍는 문화가 문제로 꼽힌다. 수사선상에 오른 사실이 알려지는 자체만으로도 더 이상 사회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의 타격을 입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 교수는 “구속을 마치 법정형이 확정된 것처럼 여기는 국민들의 인식도 문제”라며 “이런 분위기에선 사회적 지위가 높고 명예를 중시하는 분일 수록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수사기관의 인권 감수성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지적도 강하다. 지난 5월 한 여성 유튜버의 호소로 알려진 ‘비공개 스튜디오 촬영회’ 사건의 피의자 A씨가 최근 극단적인 선택을 한 데에는 수사를 담당한 경찰의 태도도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앞서 한 언론에서 피해자 측에 불리할 수 있는 카카오톡 메시지 내용을 공개하자, 이 사건을 담당하는 서울경찰청 소속 이모 총경은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피의자 신분의 혐의자가 푼 독(毒)을 덥석 물었다”며 “전형적 회유와 협박, 물타기 수법을 언론이 확성기를 틀어 증폭했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보기에 따라 피고소인을 가해자로 단정한 것처럼 읽힐 수 있는 만큼 부적절한 대응이었다는 지적이다. A씨는 “수사 기관이 제 말을 믿지 않고 모델들의 말에만 의존하고 있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백 교수는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피의자들의 이런 측면을 고려해 경찰 또는 검찰 수사관들이 자살예방 교육을 받는 게 의무화 돼 있다”며 “우리나라는 아무래도 피의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시스템이 부족한 게 사실”이라고 꼬집었다.
수사기관이 수사가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 측근이나 가족을 대상으로 수사를 확대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 구속영장 청구 시 일본처럼 긴급체포를 하지 않는 점 등에 대한 지적도 있었다.
◆미디어가 쌓아올린 ‘학습 효과’
언론과 미디어가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언론이 자살 사건에 다소 온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 문제란 것이다. 고인에 대한 평가와 추모도 물론 중요하지만 우리나라 자살문제의 심각성을 감안할 때 ‘사실관계만 건조하게 써야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유현재 서강대 교수(커뮤니케이션학부)는 “보도 자체를 막을 수는 없지만 언론이 감성적으로 접근하면 대중에 미치는 파급 효과가 더 클 수 있다”며 “커트 코베인이나 로빈 윌리암스의 자살을 보도했던 해외 언론들이 이성적으로 상황을 알리는 쪽에 무게를 둔 것처럼 우리도 원칙에 맞춰 건조하게 보도했다면 어땠을까 한다”고 말했다.
그나마 윤리강령과 자살보도준칙이 있는 언론계와 달리 드라마나 영화 쪽은 사실상 규제가 전무하다. 유 교수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보니 자살을 미화하거나 자극적인 소재로 쓰는 경우가 너무 많다”며 “폭력이나 성적인 묘사, 흡연 장면이 안방극장에서 사라진 것처럼 자살 묘사 관련해서도 일정 부분 규제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미디어학과 교수는 “자살이라는 것만 놓고 보면 ‘잘못된 선택’이라고 국민들이 제대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미디어의 역할 아닐까 한다”며 “문제에 직면했을 때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에 대한 ‘학습 효과’가 이미 오랫동안 누적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유명인의 자살 이후 모방자살이 잇따른다는 점은 실제 통계와 여러 연구에서 확인된 바 있다.
‘자살이 문제 해결의 수단이 될 수 없다’는 점에 대해선 모든 전문가들의 의견이 일치했다. 시야를 넓히면 다른 대안이 있는 경우가 많은 데다 남겨진 유가족들이 받아야 할 상처가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한국자살예방협회 한 관계자는 “자살자 유가족의 경우 보통사람보다 자살위험이 8배나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며 “극단적인 선택 이후 문제가 해결되는 경우는 아직 듣거나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생명의전화 하상훈 원장은 “남에게 치부를 털어놓지 않고 혼자 끙끙대며 고민하다보니 별다른 해법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타인의 실수를 이해해주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등 사회적 포용력이 높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유명 인사들의 경우엔 어려움을 잘 극복해 제2의 삶을 사는 등 ‘다른 선택지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대중에게 보여줬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덧붙였다.
이창수 기자 winteroc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