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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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氣 살리자] "명문대 아니면 뭐 할래?"…'성공 강박' 시달리는 아이들

⑬ 성공 강요하는 부모들 / ‘교우관계 오래 못가’ 의식 심어 유대감 저하·성공 강박 이어져 / 시민성 약화로 사회 부적응도
얼마 전 서울 양천구 소재 한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최모(16·여)양은 친구의 모함으로 학교 앞 독서실에서 쫓겨나는 봉변을 겪어야 했다. 최양이 공부를 하면서 시끄럽게 혼잣말을 하고 책을 던지는가 하면 친구들의 학원교재를 몰래 훔쳐간다는 모함이었다. 그런 거짓말을 유포한 친구에게 따져물었더니 그 친구는 “네가 공부하는 모습만 보고 있어도 심장이 자꾸만 두근거린다. 조바심에 머리까지 하얘진다. 나도 모르게 거짓말까지 하게 됐는데 미안하게 됐다”며 눈물을 쏟았다. 최양과의 경쟁 심리에 사로잡혀 불안감에 시달리다 독서실 주인에게 없는 말을 지어냈다는 실토였다. 문제집도 스스럼없이 빌려주던 사이였던 터라 최양은 극심한 배신감에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는 충동마저 일었다고 전했다.

지방의 한 공립 고등학교에 다니는 손모(18·여)양은 학교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게 하는 부모의 극성에 가출까지 생각했다고 토로했다. 손양의 어머니는 방학 때마다 손양을 서울 유명 학원에 등록시키고 학원 근처에 원룸까지 잡아줬다. 그러면서 “평생 어울리게 될 친구들은 어차피 학원 수업 듣는 친구들이니 미리 네트워크를 잘 구축해야 한다”는 잔소리도 덧붙였다. 그런 말에 세뇌가 된 탓인지 실제 학교 친구들과는 심리적 거리감이 커져갔다. 외톨이로 지내던 손양은 어느 날 원인불명의 구토 증세에 시달렸고 병원에서 ‘스트레스성 거식증’ 진단을 받았다.

‘명문대 입학’은 대한민국 청소년들을 괴롭히는 강박이다. 가정과 학교가 주범이다. 학생을 성적순으로 서열화하는 경쟁 속에서 이제 학교는 강의 노트조차 빌리기 어려운 삭막한 곳으로 변해버렸다. “인성이 성적보다 중요하다”는 말은 끊임없이 경쟁을 강요받으며 성적에 따른 차별 대우를 직간접적으로 체험해야 하는 청소년들의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다.

◆인성보다 성공 강조하는 부모들… 자식의 시민성 떨어트려

우리나라 청소년 10명 중 6명가량은 부모와 대화를 나눌 때 ‘성숙지향형’ 대화보다는 ‘성취지향형’ 대화를 훨씬 더 많이 나누는 것으로 조사됐다.

지난해 세계일보가 이준웅 서울대 교수(언론정보학) 연구팀과 함께 서울지역 6개 초·중·고교 학생 976명(초 353명, 중 382명, 고 241명)을 대상으로 ‘가정 내 의사소통 양식’을 설문조사한 결과다. 학생별로 부모 등 가정 내 보호자가 자주 강조하는 얘기와 관련해 10가지 문항에 응답한 점수를 합산해 분석한 뒤 백분율로 환산했다.

‘성취지향성’을 측정하는 항목은 ‘친구와의 경쟁에서 앞서 나가는 것 강조’, ‘사회에서 인정받는 직업에 대한 강조’, ‘성적과 대학 진학 등에 관한 이야기 편중성’, ‘공부만 잘 하면 다른 건 대체로 용서되는 분위기’ 등 총 5가지로 구성됐다. 반면 ‘성숙지향성’을 측정하는 문항은 ‘이웃과 사회에 도움 되는 삶에 대한 중요성 강조’, ‘사람 됨됨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야기 비중’, ‘더불어 살아가는 인생에 대한 가치 언급’ 등의 항목으로 구성됐다.

조사에서 전체 응답자의 평균 59%는 가정에서 성숙지향형보다 성취지향형 대화를 많이 나누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정도는 초등학생(55.4%)보다 중학생(62.2%)과 고등학생(59.1%)이 더 심했다.
가정에서 성공을 강조하는 성취지향형 대화를 많이 나눌수록 시민성이 떨어지는 경향을 보였다. 시민성 측정 항목은 ‘절차적 정의에 대한 중요성 인식’, ‘학급·학교·지역 대표에 대한 관심’, ‘공동으로 정한 규칙준수에 대한 필요성 인식 정도’ 등 총 5가지 문항(25점 만점)으로 구성되었다. 조사 결과 우리나라 학생들의 시민성 수준은 초등학생(18.79점)과 중학생(17.61점), 고등학생(16.56점) 가릴 것 없이 10점대에 그쳤다. 
◆청소년기 성공에 대한 지나친 강요… 유대감 저하는 물론 ‘성공강박’으로 이어져

전문가들은 자녀 성적에 대한 부모의 과도한 집착이 자녀의 성공 강박이나 열등감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자신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시달린 청소년들은 성년이 돼서 타인에 대해 지나친 경쟁심과 공격성을 드러내거나 스스로 열등감에 빠져 심할 경우 자살 충동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동귀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다수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친구와 끊임없이 비교당하며 부모를 만족시키기 위해 학업에 전념한 학생들의 경우,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그들이 요구하는 기준에 부합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사회부과 완벽주의’(socially prescribed perfectionism)에 시달릴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청소년기부터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일종의 ‘인맥관리 행위’로 생각하는 경향이 생겨나고 있다”며 “자기가 속한 사회적 준거집단을 어떻게든 높이려는 과정에서 자신보다 공부를 못하고 경제적 여건이 좋지 못한 친구를 자신과 대등하게 여기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이게 되는데, 결국 이런 것들이 삐뚤어진 특권의식과 일탈행위를 낳게 된다”고 지적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어렸을 때부터 과도한 경쟁을 체험하면서 경쟁이 미덕이고, 학업경쟁에서 훌륭한 성과를 보이는 친구를 선망의 대상으로 여기는 경향성이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며 “그렇게 성장한 이들은 불평등을 고착화하는 사회적 시스템이나 부조리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갖기보다 이를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기 쉽다”고 말했다.

김라윤 기자 ry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