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예언서 정감록에서 전쟁이나 재난이 일어나도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십승지 중 한 곳으로 꼽은 곳이 소백산 아래 자리 잡은 풍기다. 십승지 10곳 중 첫 번째로 여겨지는 명당이다. 살기 좋은 곳으로 꼽힌 곳이니 찾는 외지인이 많았다. 지금처럼 터전을 옮겨 새로운 곳에 정착하는 것이 수월한 때가 아니니 마을에 새로운 얼굴이 나타나면 관심을 받게 된다. 하지만, 십승지 풍기엔 전국에서 많은 이주민이 모여들었다. 이주민의 출입이 많은 곳이므로 정체를 숨기고 활동하려는 이들에겐 이만한 장소가 없었을 것이다.
대한광복단 기념공원의 추모탑. |
1910년 경술국치 후 일제는 폭압적인 무단통치를 감행했다. 1919년 3·1운동 때까지 10년을 일제강점기 중 무단통치기로 분류한다. 결사와 집회 그리고 언론의 자유를 박탈당했다. 길에서 두 사람이 만나 이야기만 해도 잡혀갔을 정도로 입과 귀를 막고 손발까지 묶어버렸다.
그래도 우리 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망마저 꺾지 못했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비밀단체를 조직해 독립운동을 추진했다. 일제강점기 초기 국내 독립운동단체 중 가장 규모가 크고 활동범위가 넓었던 단체가 바로 대한광복회였다. 이 단체의 전신인 대한광복단이 결성된 곳이 경북 영주의 풍기다. 이주민이 많으니 새 인물에 대한 관심이 적어 의심을 덜 받은 것이다. 경북 상주에서 풍기로 이주한 채기중의 주도로 1913년 유창순, 유장렬, 한훈, 김상옥 등 우국지사들이 가입해 활동했다. 이들 대부분이 영주가 고향이 아닌 외지에서 모여든 이주민이었다. 다른 지역 독립운동이 지역과 가문을 기반으로 활동한 것과는 차이가 있다.
대한광복단 결성에 주도적 역할을 한 채기중. |
대한광복회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한 인물들이 익숙한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독립군 양성과 무장 항일투쟁의 선구자적 역할을 한 이들이 있었기에 향후 의열단 투쟁, 만주의 독립운동 등이 빛을 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들의 활동이 덜 알려진 것처럼 이들의 흔적도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경북 영주에서 이들의 활동을 되짚을 수 있는 곳은 대한광복단 기념공원 정도다. 공원의 전시실은 5테마로 대한광복단의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1전시실은 경술국치 전후 대표적인 독립운동을 소개하고 있다. 2전시실은 대한광복단의 결성과 주요 활동 등을, 3전시실은 대한광복단을 계승한 단체와 의의 등을 전시해놨다. 4전시실은 영주의 다양한 독립운동사를, 5전시실은 대한광복단과 대한광복회의 주요 인물 채기중, 박상진, 김상옥 등의 활동 내역 등을 소개하고 있다. 전시실 외부에 조성된 공원엔 대한광복단 추모탑과 기념비 등이 전부다.
근대역사문화거리의 영광이발관. |
경북 영주 무섬마을 모래사장과 천을 가로지르는 외나무다리. |
지금이야 추억을 쌓을 수 있는 외나무다리지만, 일제강점기 때는 마을 청년들이 독립운동을 하다 붙잡힌 채 건너던 다리다. 무섬마을은 350년 전 반남박씨가 자리 잡고, 이후 선성김씨가 들어와 이룬 집성촌이다. 100가구도 안 되는 무섬마을이지만 독립운동 서훈을 받은 이들만 다섯명이나 된다.
무섬마을 아도서숙. |
경북 영주 부석사. |
영주는 최고, 최초란 단어와 연관이 깊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이었던 부석사 무량수전은 1970년대 초 최고(最古)의 자리를 안동 봉정사 극락전에 내줬다. 현재 건축물의 중수(수리) 시기를 보고 역사를 따졌다.
무량수전은 1916년 일제강점기 때 해체, 수리하면서 발견된 묵서명에 ‘1376년(고려 우왕 2년)에 중창되었다’고 적힌 글이 나와,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이 됐다. 약 60년이 지난 1972년 극락전을 해체 복원할 때 발견된 상량문에서 고려 공민왕 때인 1363년 지붕을 중수했다는 기록이 발견됐다. 불과 13년 차이지만,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알려졌던 부석사 무량수전은 중수 시기가 앞선 극락전에 최고의 자리를 넘겨줬다.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이 만나는 곳에 들어선 부석사 아래로 펼쳐진 산너울 풍광을 보면 딴 세상에 있는 것 같다. |
천왕문부터 무량수전까지 이어진 108계단을 오르다가 안양문에 이르면 허리를 한 번 굽혀야 무량수전 앞에 설 수 있다. 계단을 다 오른 뒤 만나는 석등의 자리가 묘하다. 법당 왼쪽에 치우쳐 있다. 자연스레 몸은 공간이 더 많은 오른쪽으로 향한다. 석등을 지나자 어렴풋이 이유를 알게 된다. 법당 안 불상 소조여래좌상의 자리가 왼편이다. 법당 정면이 아닌 왼편에 자리 잡아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다. 중생들을 자연스레 법당 오른쪽 입구로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경북 영주 부석사. |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을 설립한 뒤 퇴계 이황이 조정에 건의해 소수서원으로 사액됐다. |
소수서원 앞을 흐르는 죽계천 바위에 새겨진 ‘경(敬)’자. |
단종 복위를 꿈꿨지만 실패한 금성대군 신단. |
영주=글·사진 이귀전 기자 frei5922@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