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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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징용 재판 늦춰야"…'애국심' 강조한 朴 정부의 재판 거래

“자기 나라 역사를 모르면 혼이 없고, 잘못 배우면 혼이 비정상이 될 수밖에 없다.”—박근혜 전 대통령의 2015년 11월 청와대 국무회의 발언

“국민이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할 때 나라가 발전하는 것이고 또 공직에 있는 우리도 더욱 그래야 한다.”—박근혜 전 대통령의 2016년 1월 청와대 국무회의 발언

박근혜 전 대통령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2015년 10월1일 계룡대에서 열린 건군 제67주년 경축연에서 밝은 표정으로 대화하고 있다.
자료사진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사건을 수사 중인 검찰이 최근 박 전 대통령의 ‘재판 거래’ 정황을 포착했다.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전범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고의로 지연시켜달라고 박 전 대통령이 사법부에 요구했다는 게 검찰 판단이다. 올바른 역사인식과 애국심을 강조하던 박 전 대통령의 과거 발언이 새삼스럽게 다가오는 이유이다.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부장검사 신봉수)와 특수3부(부장검사 양석조)로 구성된 법원 수사팀은 지난 14일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을 소환 조사하는 과정에서 “박 전 대통령이 징용소송 대책을 마련해보라고 지시했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검찰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 지시를 받은 김 전 실장은 2013년 12월1일 차한성 당시 법원행정처장(대법관)과 윤병세 당시 외교부 장관, 황교안 당시 법무부 장관을 서울 종로구 삼청동 자신의 공관으로 불러 ‘4자 회동’을 가졌다. 검찰은 김 전 실장 등이 차 전 처장한테 확정판결을 앞둔 피해자들 재판을 대법원 전원합의체로 넘기는 등 방법으로 지연시켜달라고 요구했다고 의심하고 있다.

그해 10월에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청와대에서 주철기 당시 외교안보수석을 만나 피해자들 재판 진행 상황과 향후 방향 등을 논의했다. 임 전 차장은 이 자리에서 주 전 수석한테 법관 해외 파견 지원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행정처가 내부 보고서에 “한일관계 개선을 추진하는 정부에 ‘절차적 만족감’을 줄 필요가 있다”고 적은 것은 이미 알려진 바다.

검찰 관계자는 “엄연히 개인 간 민사소송인 만큼 법관이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하는 게 맞다”며 “재판 절차에 청와대를 포함한 누구든 개입해선 안 되고 대법원이 그런 요구를 수용해서도 안 된다”고 말했다. 검찰은 ‘재판 거래’ 의혹에 박 전 대통령이 관여한 사실이 확인된 만큼 조사가 불가피하다고 보고 수사 일정을 조율할 방침이다.

배민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