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지방법원 이정엽(사진) 부장판사가 올해 초부터 ‘블록체인 법학회’(가칭)를 창설하려는 것도 이런 문제의식에서 비롯됐다. 지난 18일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최근 블록체인 및 암호화폐 규제 논란에 대해 “규제라는 딱딱한 단어보다는 ‘생태계 디자인’을 한다는 식으로 접근해야 한다”며 우리나라 블록체인 관련 법제의 문제를 지적했다.
이 부장판사는 “제도적 장치가 없는 상태에서는 새로운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새로운 네트워크의 가치를 이전할 블록체인 기술을 개발할 수는 없다”며 “우리나라는 블록체인과 관련해 규제로 기술개발을 제약하는 상황이 아니라 오히려 산업을 육성할 수 있는 제도가 없는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예시로 암호화폐 시장에 난립하고 있는 ICO(Initial Coin Offering) 문제를 꼽았다. ICO는 향후 만들어질 블록체인 기반 자산을 현재의 법정통화로 구매하는 것이다. 이 부장판사는 이런 행위가 짧은 시간 안에 실물 대비 가치가 상승하길 바라는 투자행위와 다름이 없어 ‘도박성’이 있고, 적절한 규제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투자자를 보호할 제도적 장치는 미비한 상황이다.
이 부장판사는 “ICO로 판매된 암호화폐에 대해 미래에 가치를 제대로 지불하지 않아도 현재의 형사법적 체계 내에서는 처벌하기 쉽지 않다”면서 “투자자들을 보호하는 기본 틀이 있어야 블록체인 생태계를 육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금융상품의 역사는 곧 거래소의 역사”라며 암호화폐 거래소에 대해 적절한 규제를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증권거래소가 증권선물위원회에서 감시·감독을 받듯 암호화폐 거래소도 적절한 감시·감독 기관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지난해 말 ‘비트코인 광풍’이 입증하듯, 관련 기관이 손도 쓰지 못하는 새 암호화폐 거래가 이뤄져 암호화폐 시장이 일종의 ‘도박판’과 같은 형태로 변질됐다는 지적이 잇따른 바 있다. 이 부장판사는 “암호화폐 시장은 물론 이를 활용한 ‘토큰 이코노미’의 잠재력은 무한하다고 생각하며, 이를 육성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거품(자본 쏠림)도 생겨야 한다. 하지만 거품을 그냥 커지도록 방치하는 게 아니라 창조적이고 모험적인 조직에도 자금이나 인력이 지원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법제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블록체인과 관련해 최근 이 부장판사가 관심을 두는 분야는 정보에 가치를 부여하는 작업이다. “과거 ‘정보는 자원’이라고 했는데, 이제는 그 자원의 원천이 어디인지 생각해볼 때”라고 운을 뗀 그는 “과거에는 사람들의 행동이 모두 포착되지 않았는데, 요즘은 인스타그램으로 사진을 올리거나, 페이스북에서 ‘좋아요’를 누르는 등의 행위가 디지털화된 정보로 바뀐다”며 “‘좋아요’를 누른 횟수나 클릭 수로 환산되는 ‘선호’ 개념을 ‘토큰’ 화해서 하나의 자원으로 상용화하는 아이디어도 블록체인으로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이 부장판사는 이런 연구를 위한 작업으로 오는 24일 학회를 창립해 연구를 이어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는 “정보는 자원이고, 자원은 그 소유권이 분명해지는 경우 자본의 길을 걷게 될 것이고, 지금의 자본주의와는 다른 더 고차원적인 자본주의가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블록체인의 앞날을 전망했다.
정선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