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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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간 냄비 속 개구리"… 혁신성장동력까지 떨어져 '설상가상' [심층기획]

'냄비속 개구리' 한국 경제/‘글로벌 금융위기 10년’ 전문가 진단
2008년 9월15일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각, 미국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가 뉴욕 남부 파산법원에 파산보호 신청을 하겠다는 보도자료를 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뉴욕 증시를 비롯한 국제 금융시장이 일시에 패닉에 빠졌다. 글로벌 금융위기 10년을 계기로 되돌아본 한국 경제는 낙관적이지 않다. 재정, 금융정책, 고환율정책을 통한 수출 확대로 금융위기를 조기 극복하며 ‘위기 탈출 모범국’이라는 평가를 얻었지만 전문가들은 ‘거기까지였다’고 평가한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의 성장경로로 돌아가지 못하고 저성장의 늪에 빠져 지난 10년간 제자리걸음에 그쳤다는 것이다. 전문가 10명에게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0년에 대한 평가와 과제를 물었다.
◆“10년간 냄비 속 개구리”… 가계부채·양극화가 폭탄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13일 본지와의 통화에서 “지난 10년 동안 우리나라는 성장률이 올라가지도 않고 내려가지도 않는 ‘좀비 상태’에 가까웠다”며 “경제라는 것은 증폭이 있어야 경제 활력이 생기고 새로운 투자가 이뤄지고, 또 한계기업이 퇴출되는 등 선순환이 일어나는 것인데 우리는 가만히 있는, 그러니까 냄비 속 개구리와 같은 상태”라고 말했다.

수출을 제외한 각종 경제 지표들은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다. 고용, 양극화, 출산율 등의 주요 경제 지표 뒤에는 매달 ‘쇼크’라는 단어가 따라다닌다. 송원근 한국경제연구원 부원장은 “정부가 노동 공급에 대한 문제, 저출산 문제 등에 마땅한 대안이 없는 것 같아 보인다”며 “설상가상 주력산업 경쟁력이 떨어져 가고 있고, 신성장 동력은 안 보인다”고 진단했다. 홍춘욱 키움투자증권 연구위원은 “저성장이 일상화되었다. 혁신이 사라지면서 성장이 둔화됐다”며 “가계부채가 증가하고 혁신성장 동력도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가계부채 증가와 부동산 쏠림 현상을 한국 경제의 ‘폭탄’으로 꼽았다. “가계부채와 부동산이 가장 큰 문제다. 금융위기 이후 늘어난 통화량이 산업에 대한 투자로 이어지지 않고 부동산으로 흘러들어 갔다”(최영준 경희대 무역학과 교수), “가처분 소득 대비 한국의 가계부채는 정말 심각한 상황이다. 또다시 위기가 온다면 가계가 될 것”(김두언 KB증권 이코노미스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2분기 가계부채는 1493조1555억원으로 1500조원의 턱밑까지 다다랐다. 2008년 가계대출액 723조5215억원의 두 배를 훌쩍 넘긴 액수다. 10년 만에 가계부채가 2배로 늘어난 셈이다. 가계부채의 태반은 부동산에 잠겨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국내 은행의 가계대출 660조4000억원 가운데 주택담보대출 비중은 70.2%(463조7000억원)에 달했다. 금리 인상기에 취약 차주들이 무너지지 않도록 선제적인 대응이 필요한 시점이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촉발한 것도 미국의 서브프라임모기지론(비우량주택담보대출)이었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는 지적이다.
위기 시에 기댈 수 있는 외환시장의 ‘안전판’은 통화스와프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39억달러, 2008년 외환위기 당시 2005억달러까지 쪼그라들었던 외환보유액은 지난 6월 사상 최초로 4000억달러를 돌파하며 외환건전성이 좋아졌지만 안심하기는 어렵다. 중국, 캐나다, 스위스 등과 통화스와프 등을 체결했지만 정작 2008년 외환위기를 막았던 한·미 통화스와프 계약이 2010년 종료됐고, 한·일 통화스와프도 2015년에 종료된 상황이다. 오정근 건국대 금융IT학과 특임교수는 “글로벌 금융위기를 우리나라가 극복 잘했다는 것은 일면 맞지 않다. 위기는 아직 이어지고 있다”며 “한국에 들어온 외국인 투자자금을 감안하면 외환보유액이 실제 부족하고, 각종 공기업 부채, 공무원 연금 등에 들어갈 충당금까지 합치면 정부 부채도 위험 수준에 도달했다”고 경고했다.

◆규제개혁 통한 혁신성장, 노동시장 개선 필요

또 다른 위기에 대비하기 위해선 과감한 규제개혁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았다.

유정주 전국경제인연합 기업혁신 팀장은 “오히려 2008년부터 규제는 강화해 왔다. 주 52시간,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 유례없는 공정거래법상의 처벌 조항 등 규제를 강화할 것이라는 시그널 때문에 국내 기업들이 자꾸 해외로 나간다”며 “일부 규제 몇 개 푼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이제는 ‘혁신’을 강조하며 규제를 과감히 혁파한다는 정부 차원의 시그널을 기업인들에게 확실히 각인시켜, 투자의지를 다시 되살리려는 방향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우리나라 서비스 산업은 기술은 발달했을지 모르나 온갖 규제로 산업은 발달하지 못했다”며 “말레이시아 등의 급변하는 의료관광 등을 보면서 주력 산업에 대한 패러다임의 변화를 시도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허찬국 충남대 무역학과 교수는 “수출 다변화는 당연히 필요한 것이고 세계적인 산업 분야에서 우리가 비교우위를 가질 수 있는 상품들, 핵심제품들을 더 많이 만들어 낼 수 있도록 기술 혁신을 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선과 벤처생태계 조성이 필요하다는 주문도 이어졌다. 송원근 부원장은 “진짜 본질적인 문제는 노동시장 이중구조가 갈수록 심화하고 있는 것이고 노동시장 경직성까지 더해진 상황”이라며 “선진국처럼 고부가가치 산업에서 선별적으로 해외 인력을 받아들일 필요도 있다”고 조언했다. 신진영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는 “우리나라 벤처생태계가 아직 잘 조성되지 않아 역동성이 상당히 떨어진다. 회생제도의 개선이 더 필요하다”며 “증권사들을 비롯한 금융기관이 자체 역량으로 선순환 투자가 이뤄져야 하고 정부에서도 자금 지원에 따른 성과평가 체계를 갖출 필요도 있다”고 설명했다.

세종=박영준 기자, 김라윤 기자 yjp@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