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에서는 『고마워요, 엄마』를 연재합니다.
버거운 삶의 무게를 견디며 자신보다는 자식을 위해 기꺼이 헌신하는 존재 ‘엄마’. 엄마의 위대함을 느끼는 건 엄마가 되는 순간입니다.
작은 일에도 세상을 다 가진 듯 환한 미소를 지으며 웃어주는 ‘엄마’. 힘들고 지칠 때면 엄마는 곁으로 다가와 함께 합니다. 마음 한 켠에는 “우리 엄마, 내가 사랑하는 엄마”라고 항상 되뇌지만, 막상 행동으로 옮기지 못합니다.
“우리는 엄마의 고마움을 잊고 사는 것은 아닐까요?”
‘엄마’의 자식으로 살아가는 그들의 목소리를 『고마워요, 엄마』에 담고자 합니다.
<편집자주> 예부터 추석은 조상들께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가족의 행복을 바랐던 뜻깊은 날입니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 명절은 가족의 화합이라는 의미보다는 차례상이나 성묘 등의 의식이 주가 되고, 갈등 없이 무사히 지나가길 바라는 가슴 아픈 휴일이 돼버렸습니다. 저마다의 명절을 쇠는 우리들. 잠깐 멈춰서 우리 가족의 명절을 돌아볼까요?
오랜만에 뵌 우리 부모님의 말귀가 어두워지셨습니다. 했던 말씀도 계속 반복하시고 성격도 전과는 달라지신 것 같습니다. 우리 부모님도 혹시 치매가 찾아오는 것일까요? 언제쯤 우리 부모님과 제대로 된 대화를 했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있으니 대화가 쉽사리 안 되고, 귀가 어두워지시니 크게 말하면 싸우는 것 같아 대화가 단절됩니다.
중앙치매센터가 발간한 ‘대한민국 치매현황 2017’에 따르면, 65세 이상 노인인구 678만명 중 추정치매환자는 66만명, 추정경도인지장애환자는 150만명으로 노인 10명 중 3명은 기억력 감퇴가 가속되고 있습니다. 문재인 정부에 들어 국가적인 치매대책이 시행되고 있는 지금. 뉴스를 보며 멀게만 느껴졌던 우리 부모님의 치매가 가깝게 느껴지는 명절입니다.
2교시 공예수업에서 색모래로 그림액자를 만드는 이말숙(가명·80대) 할머니. 세월의 흔적이 담긴 손으로 가루 하나가 땅에 흩어질 까 정성스레 작품을 만든다. 다양한 그림들 사이로 단연 할머님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꽃그림에 모래 한 줌을 담는다. |
“미국에 계신 이모님이 오셔서 엄마를 보시자마자 대뜸 ‘언니 치매네, 빨리 가서 검사받아봐’라고 하셨어요. 가족들 모두 조금씩 느끼고 있었지만, 아무도 ‘치매’라는 단어를 말한 적이 없었어요. ‘우리 어머니가 정말 치매일까, 어머니가 이모님 말씀을 듣고 상처받지는 않았을까’ 갖은 걱정을 하며 병원에 갔더니, 약을 먹어보는 것이 어떻냐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이 돌아왔죠. 1년 뒤에 먹을 약을 지금부터 먹으면 좋아질 거라고 안심시키면서, 그렇게 엄마와 뗄 수 없는 껌딱지 일상이 시작됐죠.”
포근한 교실과 정겨운 마룻바닥. 아이들의 색깔로 가득한 공간은 어르신들의 들뜬 표정으로 메워진다. 초등학교 시절이 떠오르는 작고 아늑한 교실. 따뜻한 색들이 어르신들을 반기는 이곳에서 어르신들의 삶을 새로이하는 공예수업이 시작된다. 서울 용산구 치매안심센터에서 공예수업 봉사를 하는 박미라(50대) 씨는 2년 전 어머니의 치매를 느꼈다.
“처음엔 엄마가 물어본 걸 계속 물어보길래 장난치는 줄 알았어요. ‘아까 물어봤잖아~’라고 답하면 엄마는 아이의 눈으로 ‘내가 언제?’를 되물었죠. 그때 느꼈어요. 엄마에게 치매라는 병이 오고 있구나. ”
용산구 치매안심센터에서 진행되는 기억키움학교 프로그램의 어르신들이다. 치매 판정을 받지 않았으나 인지능력이 저하된 경도인지장애 어르신들이 기억키움학교를 찾는다. 작품을 만드느라 한껏 집중하시는 어르신들의 모습 사이로, 어머님들과 정수리를 맞대는 봉사자 박미라 씨.
어르신들과 같이 만든 시간표를 보이는 봉사자 박미라 씨. 우리에게 당연했던 어제와 오늘의 기억이, 누군가에게 매일 학교를 다니며 지켜나가고픈 과정이다. |
◆ 지금이 아니면... 어머니를 위한 멈춤.
오늘의 공예수업을 마친 박미라 씨에게 조심스럽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같이 마주한 지 5분도 채 되지 않아 눈가가 촉촉해진 박미라 씨는 천천히 어머니와의 이야기를 나눴다.
“어머니의 일상은 복지관에서 친구를 만나는 일이었어요. 원체 활동적이셨고 사회생활을 오래 하셨던 어머니였기에, 일단 집 밖으로 나가서 친구분들 만나는 걸 낙으로 사셨죠. 그런데 같이 병원을 다녀온 후 약을 먹기 시작하면서 일상을 바꾸셔야 했어요. 기억 교육을 받는 것이었죠. 처음엔 어머니가 친구분들을 못 만나서 안타깝고 서운해하셨어요. 어머니 말씀을 들어가면서 주 1회, 주 2회... 교육을 점차 늘려갔더니 제 노력을 아신 어머니도 교육에 재미를 붙이고 다니세요.”
어머니를 위해 같이 모시고 다니기 시작했던 치매 센터에서, 이제는 어머니와 같은 증상의 어르신들께 공예수업을 한다. 일터이자 삶의 활력소였던 공방을 잠시 닫고, 어머니와 비슷한 어르신들께 기억의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엄마를 매일 모셔다드리니 어머니와 비슷한 어르신들이 보였어요. 제가 어머니의 기억을 지켜나가고 싶듯이, 한 분 한 분의 어르신들도 가족들에 대한 기억을 마음속으로 지키기 위해 나오세요. 저는 어머니와 여기 계신 어르신들의 기억을 감싸 안는 마음으로 공예수업을 합니다.”
용산구 치매안심센터에서 진행되는 기억키움학교 프로그램의 어르신들이다. 치매판정을 받지 않았으나 인지능력이 저하된 경도인지장애 어르신들이 기억키움학교를 찾는다. 작품을 만드느라 한껏 집중하시는 어르신들의 모습 사이로, 어머님들과 정수리를 맞대는 봉사자 박미라 씨. |
◆ 어머니가 표현하는 감사의 울림
“내 평생 공예를 지금 아니면 어디 가서 해보겠어. 기억이 없어지는 건 슬픈 거야. 그렇지만 오히려 선생님을 만났으니 얼매나 좋아. 얼매나 고마워.”
공예수업을 하며 박미라 씨는 어르신들로부터 늘 고맙다는 말을 듣는다. 단순히 기억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어르신들께 인생의 새로운 시간을 선물한다.
“수업이 끝나면 어르신들이 제 손을 꼭 잡아주시는데, 그 손에서 지난 세월이 느껴집니다. 한평생 자식을 위해 헌신하셨던 어르신들의 손을 보며 우리 어머니와 딸 생각이 많이 나요. 저 역시 딸을 키우는 입장에서 어머니가 절 키우셨을 때 어땠을까 참 많은 생각이 들죠.”
감사함은 또 다른 감사함을 낳는다. 어르신들의 감사함을 느낀 박미라 씨는 공예수업을 시작으로 어머니와 같은 어르신들께 더 봉사하고 싶었다. “매주 금요일 공예수업을 하면서 어르신들을 위한 봉사를 더 해나가야겠다고 느꼈어요. 화-수요일에는 어르신들 전화 상담을 하는데, 말씀을 들어드리는 것만으로도 연신 고마워하세요. ‘고마워 정말’이라는 한 마디가 그렇게 큰 울림으로 다가와요.”
◆ 놓치지 않는 단 하나의 기억
어르신 중에는 혼자 계시지만 가족이 있는 것처럼 꾸미시는 분도 있다. 기억이 스러져가도 나와 가족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강하다. 가족 없이 혼자 사시는데, ‘가져가면 우리 손주가 뺏어가. 손주가 너무 좋아하겠다.’는 말을 하실 때면,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이 미어진다.
어르신들이 기억을 잃어도 가족과 손주를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 엄마가 놓치지 않는 단 하나의 기억이 우리 가족이라면 어떨까.
용산구 치매안심센터에서 진행되는 기억키움학교 프로그램의 어르신들이다. 치매판정을 받지 않았으나 인지능력이 저하된 경도인지장애 어르신들이 기억키움학교를 찾는다. 작품을 든 어르신 두분이 손을 마주 잡고 카메라를 응시한 채 즐거워 하고 있다. |
“지금 우리 엄마를 돌보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할 것만 같아요. 내가 모실 수 있을 때까지는 끝까지 모시고 싶습니다. 나를 믿는 우리 어머니에게, 내 말을 귀 기울여 듣는 우리 어머니에게 진심으로 감사해요. 저 역시 ‘우리 엄마의 말은 내가 들어야지’라는 생각으로 마음의 귀를 기울입니다. 지나간 일은 생각하지 않고 지금 어머니의 기억이 스러져가는 상황을 늦추는 것만이 제가 바라는 단 하나입니다.”
박미라 씨는 많은 분에게 조심스럽게 한 마디를 전한다. “미디어에서는 ‘치매’라는 증상의 과격하고 자극적인 모습이 부각되다 보니, 많은 환자 보호자들이 그런 것을 떠올리는 것 같아요. 치매는 나도 모르게 와있다 보니, 관심 있게 보지 않으면 ‘엄마 왜 그래~’라고 넘길 수 있어요. 반대로 관심 있게 지켜보면 우리 부모님을 더 오래 뵐 수 있다는 걸 많은 분이 아셨으면 좋겠어요.”
김경호 기자·김유리안나 인턴기자 stillcut@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