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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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박또박 썼던 '나, 너, 우리'…'쓰기 수업'의 아련했던 추억이 있나요?

과거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미농지를 기억하느냐’는 게시물이 올라왔다. 오랜만에 듣는다면서 제목의 미농지라는 단어 하나만 보고 글을 클릭했다는 반응이 보였다. 교과서에 종이를 붙여 흐릿하게 비친 글자를 따라 썼던 시절이 떠올랐던 것일까? 어린 시절 ‘쓰기 수업’의 추억을 되새기는 댓글도 여러 개 달렸다.

사전에 따르면 미농지는 닥나무 껍질로 만든 썩 질기고 얇은 종이다. 일본 기후(岐阜) 현(縣) 미노(美濃) 지방의 특산물에서 유래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미농지라는 말보다 영단어 ‘tracing(트레이싱)’에 종이 ‘지(紙)’를 결합한 ‘트레이싱지’라는 단어를 더 많이 쓰게 됐다. 글자 따라 쓸 때뿐만 아니라 그리기 연습을 할 때 애용한다는 이들도 있다.

미농지가 불을 지핀 어른들의 초등학교 ‘쓰기 수업’ 추억을 되짚는 동시에 그 시절 교과서가 아직 남아있느냐는 네티즌들의 궁금증 해소를 돕고자 지난 5일 한국교과서연구재단이 운영하는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교과서정보관을 방문했다.

국내 유일 교과서 전문 도서관으로 알려진 교과서정보관에는 1982년에 발행한 ‘바른 글씨 공부’라는 이름마저 생소한 교과서를 비롯해 1990년대 초반부터 불과 몇 년 전까지 사용된 쓰기 관련 교과서 60여권이 비치됐다. 읽기, 말하기·듣기 등 예전 초등학교 국어 관련 교과서도 서가에서 수십권 발견했다.

 

초등학교로 바뀌기 전 사용한 쓰기 교과서. 한국교과서연구재단의 협조로 사진 촬영.
한국교과서연구재단의 협조로 사진 촬영.


교과서 내용 구성은 무척 다양했다.

나, 너, 우리,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등 기초 단어를 연습하는 과정에서부터 네모 칸 안에 균형을 맞춰 글 쓰는 단원, 학용품이나 교통질서 어기는 아이 등을 소재로 다른 이들을 설득하는 글을 쓰게끔 전체적인 개요를 짜는 등 학습하는 이의 사고력을 증진시키는 다양한 내용이 포함됐다.

초등학교 1학년 1학기 쓰기 교과서 4권을 비교한 결과, 사용 연도에 따라 교과서 저작권자와 편찬자 그리고 발행 및 인쇄인이 다른 점도 눈에 띄었다.

1991년에 사용한 쓰기 교과서는 △지은이는 문교부(文敎部) △연구한 이는 한국교육개발원 △펴낸이는 국정교과서 주식회사로 되어 있었다. 1995년에 사용한 쓰기 교과서에는 △저작권자 교육부 △편찬자 한국교육개발원 △발행 및 인쇄인 국정교과서 주식회사로 표기됐다.

1999년과 2008년에 각각 쓰인 1학년 1학기 교과서에서는 △저작권자가 교육부와 교육인적자원부 △편찬자는 한국교육개발원과 한국교육과정평가원 △발행 및 인쇄는 국정교과서 주식회사와 대한교과서 주식회사로 인쇄됐다.

각 교대 교수와 현직 교사들로 구성된 것으로 보이는 연구진과 집필진 수도 교과서마다 달랐다. 교과서만 살펴보더라도 지난 세월 교육이 어떻게 흘러왔는지 짐작하게 했다.

 
쓰기 교과서 일부 페이지. 나, 너, 우리, 아버지, 어머니 등 기초 단어를 연습하게 구성됐다. 한국교과서연구재단의 협조로 사진 촬영.
쓰기 교과서 일부 페이지. 네모 칸 안에 균형을 맞춰 철자를 연습하게 되어 있다. 한국교과서연구재단의 협조로 사진 촬영.
쓰기 교과서 일부 페이지. 다소 긴 문장을 연습할 수 있다. 한국교과서연구재단의 협조로 사진 촬영.
쓰기 교과서 일부 페이지. 다양한 소재로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글의 개요를 짜게 되어 있다. 한국교과서연구재단의 협조로 사진 촬영.


한글의 중요성을 아이들에게 각인하는 차원에서 학년별 쓰기 교과서 표지 뒷면에는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대왕과 훈민정음 반포하는 장면을 나타낸 그림인 ‘훈민정음 반포 가상도’ 등이 인쇄되어 있었다.

우리말과 한글의 전문적인 연구와 후진 양성으로 한글 대중화와 근대화의 개척자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국어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주시경 선생의 얼굴도 교과서 표지 뒷면에서 발견됐다.

교육 분야 종사자나 사범대·교대생 또는 일반인들이 교과서정보관을 자주 찾아온다고 관계자는 귀띔했다. 이날도 사회와 한문 교과서 여러 권을 앞에 쌓아두고 저마다 연구에 한창인 시민들이 관찰됐다.

교과서정보관이 소장한 도서는 대부분 출판사 기증품이다. 누군가의 글씨가 지워지지 않은 교과서가 과거 글쓰기 교육의 살아있는 증거로서 찾아오는 이들을 맞이했다. 가족의 사랑을 또박또박 책에 써 내려갔던 20여 년 전 초등학생은 지금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쓰기 교과서 표지 뒷면. 세종대왕, 주시경, 훈민정음 반포 가상도 등이 인쇄됐다. 한국교과서연구재단의 협조로 사진 촬영.


한편 일각에서는 쓰기의 중요성이 점점 약해지는 것 같다는 우려를 제기한다. 자기 생각을 정리하고 펼친 결과물이 글인데, 써 볼 기회가 줄어든다는 거다. 평소 연습이 되지 않으니 생각은 파편이 되며, 정리하는 방법을 모르니 자기 인생을 소개하는 글조차 취업시장에서 대필하는 웃지 못할 상황까지 나온다는 지적이다.

출판업계의 한 종사자는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느냐고 물어오는 사람들이 있다”며 “생각을 정리하는 능력이 생길 때 비로소 글을 잘 쓸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사고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글을 잘 쓰고 싶다는 건 터무니없는 욕심”이라고 강조했다.

교육계의 한 관계자는 “입시 위주 교육 탓에 글을 빨리 읽고 파악하는 데서 국어 수업이 끝나는 게 현실”이라며 “어릴 적 형성된 글쓰기 습관은 평생 이어지는 만큼 어른들의 적극적인 관심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김동환 기자 kimcharr@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