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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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할 수 없는 얼굴들 기록” 사진가 육명심 화보집 ‘이산가족’ 발간

맹문재 시인 해설 ‘이산가족의 만인보(萬人譜)’ 덧붙여
“이번에 처음으로 공개하는 사진들은 어찌 보면 TV 화면의 단순한 복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지 모른다. 이것이 과연 예술적 표현이냐고 누가 묻는다면, 이에 대해서는 또 무어라 답해야 할까. 예술의 역사에서 새로운 조류의 탄생은 그 시대의 필연적인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예컨대 팝 아트가 산업사회의 산물이듯,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는 영상 문화가 일상화된 생활공간 속에서 자연스럽게 피어난 예술의 새로운 소산이다. 내가 TV를 카메라로 찍는 시도를 했던 것도 1980년대 초, 이와 비슷한 시기다. 다만 표현의 방식이 조금 달랐던 것뿐이다. 1980년대 당시 나의 사진적 시도는 이러한 시대적 맥락에서 발현되었으며, 그런 시대를 고민한 끝에 나온 결과물의 하나로 봐 주었으면 한다.”

원로 사진작가 육명심(86)이 1983년 138일동안 온 나라를 감동과 울음바다로 만들었던 KBS 특별 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캠페인 현장을 기록한 화보집 ‘이산가족’(열화당)을 펴냈다. ‘이산가족’에는 광장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얼굴, 끝내 가족을 찾지 못해 눈물을 흘리는 얼굴, 소망을 이룬 기쁨에 오열하는 얼굴 등 다양한 ‘이산의 얼굴’이 담겼다. 

원로 사진작가 육명심이 35년만에 펴낸 KBS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캠페인 화보집 ‘이산가족’.
KBS는 1983년 6월 30일 밤 10시15분부터 33주년 및 휴전 30주년 특별 프로그램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를 기획했다. 한 번만 진행하는 단발성 프로그램이었다. 하지만 이산가족 150여 명을 초대해 1시간30분 정도로 진행하려던 계획과 달리, 1000명이 넘는 신청자와 방송국으로 몰려 간 시청자들, 전화를 건 이들로 방송국이 북새통을 이루어 새벽 2시가 넘어서야 겨우 마무리되었다.

예상과 달리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과 실제 이어지는 기적으로 열기가 뜨거워지자 KBS는 가족을 찾으려는 이산가족들의 간절함을 수용해 본격적으로 이산가족찾기추진본부를 설치하고 방송 체제를 갖추었다. 이로써 결과적으로 453시간 45분, 138일을 기록한 대단원의 막이 열린 것이다. 

TV를 활용한 세계 최대 규모의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인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업무수첩, 신청서, 방송진행표, 사진 등 2만522건에 달하는 기록물을 남겼고, 이는 2015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우리나라의 이산가족은 1864년 연해주 방면으로 이주한 노동자들을 시작으로 크게 세 차례의 역사적 격변으로 발생되었다. 그중 8·15 광복 이후 남북 분단으로 한국전쟁 전까지 월남한 실향민의 수는 350만 명에 달하고, 한국전쟁 동안에만 140만 명 이상이 가족과 이별했다.

138일동안 온 나라를 감동과 울음바다로 만들었던 KBS 특별 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KBS의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힘없고 빈곤한 이산가족들이 자신들의 사연을 직접 발표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의 통로 역할을 해냈다. 경제 수준의 향상으로 신문·라디오·전화뿐 아니라 TV를 보유하게 된 이산가족들은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했으며, 방송국으로 여의도광장으로 직접 나가 흩어진 가족들을 찾았다. 서울과 지방을 연결하는 다원방송의 메커니즘과 컬러TV가 보여 주는 생동감, 생방송의 현장감을 적극 활용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위성 중계방송을 시작으로 일본·서독 등 세계 각국으로도 전파되어 뜨거운 한민족의 핏줄을 이어 준 계기가 되었다.

1960년대부터 ‘한국적인 것’을 향한 탐구를 지속해 온 한국의 대표적 사진가 육명심은, 1983년 당시 그들과 함께 광장에 있었고 TV 화면을 통해 상봉의 순간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대적인 혼란에 쫓기고 전쟁의 폭력에 고통받은 민초들의 초상을 담아낸 그의 사진작업은 ‘우리 것’을 기록·보존해 후세에 전해야 한다는 판단에서 작업을 이어 왔다는 그 자신의 말과 맥을 같이한다. ‘이산가족을 찾습니다’가 진행된 당시 촬영한 작업을 35년이 흐른 지금 처음 공개하는 이유 역시 이와 통한다. 이 캠페인으로 1만189가족이 상봉하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여전히 1000만 명 이상의 이산가족이 존재하며 그 중에는 가족의 생사조차 모른 채 살아가는 이들도 많다. 이산가족으로서 겪은 시간은 흔적으로 남은 과거가 아닌, 현재진행형으로 전개되는 시간인 것이다.

육명심은 그동안 ‘인상(印象)’ ‘백민(白民)’ ‘장승’ ‘검은 모살뜸’ 등 한국의 정서를 담은 연작을 발표하며 ‘우리 것’에 대한 애착심을 표현해 왔다. 하지만 그는 대상과의 만남을 통해 정서적인 공감대를 이루어 나갔던 일련의 작업들과 달리, ‘이산가족’ 작업 당시에는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자꾸만 앞섰다’고 말한다. 흡족함보다는 우리 겨레 전체의 가슴을 아프고 서럽게 만든 것에 대한 원망과 억울한 감정이 들은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고민에서 발현된 ‘이산가족’은 그가 지속적으로 고민했던 ‘한국의 정신’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주제임이 아닐 수 없다. 

‘대체 불가능한 얼굴들의 기록’인 KBS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를 찾은 이산가족들. 6·25전쟁 때 잃어버린 가족을 찾고자 하는 열망이 절절하다.
화보집 ‘이산가족’에는 광장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얼굴, 끝내 가족을 찾지 못해 눈물을 흘리는 얼굴, 소망을 이룬 기쁨에 오열하는 얼굴 등 비극적인 역사가 만들어낸 시간을 겪어 온 얼굴들이 가득하다. 육명심은 이산가족의 얼굴들을 끌어안아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고 정서를 육화시켰으며, 그들이 겪은 기적의 시간들을 표현해냈다. 그 시간들은 방송국, 만남의 광장 등의 ‘장소’와 결합해 심화·확장되며, 시간과 결합한 장소는 실제보다 유기적이고 전체적이며 운명과 분리되지 않는 역사성을 띤다.

‘이산가족’에는 그뿐만 아니라 ‘이산가족을 찾습니다’가 방송되고 있는 TV 화면 속 얼굴들도 담겨 있다. 이 운동에서 중요한 장소는 오히려 광장보다 화면이 비추던 그 수많은 작은 장소들일지도 모른다. 육명심은 자전적 연대기와 같은 작가의 말에서 이러한 사진적 시도에 대해 조심스레 회고한다.

육명심 화보집 ‘이상가족’은 시인이자 문학비평가인 맹문재 안양대 국문학과 교수의 해설 글 ‘이산가족의 만인보(萬人譜)’가 더해져 화룡점정의 미학을 완성한다. 맹 시인은 이산가족 찾기 운동의 역사를 자세히 다룸으로써 사진에 기록적 가치를 부여한다. 또한 그는 ‘이산가족의 얼굴’을 이탈해서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질 수 없음을, ‘대체할 수 없는 얼굴들’이라는 표현으로 진단한다. 우리에게 분단은 극복해야 할 절실한 과제이며 이산가족과 함께하는 자세야말로 민족 구성원으로서 감당해야 할 의무이자 책임으로 인식한 까닭이다.

책을 펴낸 열화당은 “육명심은 이산가족의 얼굴들을 끌어안아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고 정서를 육화시켰으며, 그들이 겪은 기적의 시간을 표현해냈다”고 평가했다.

조정진 기자 jjj@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