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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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연국칼럼] 권력의 갑질

싱가포르는 노사정 골프회동으로 / 경제성장과 일자리 협력 모색 / 한국은 국감 때 기업인 불러 호통 / 反기업 정서로 투자 갈수록 위축
# 싱가포르의 조세핀 테오 노동부 장관에게 수요일은 특별한 날이다. 그는 매주 희뿌연 새벽 공기를 가르며 골프장으로 달려간다. 그의 골프 파트너는 싱가포르 경영자총협회장과 전국노동조합위원장이다. 티업 시간은 정확히 오전 5시45분. 경총 회장이 드라이브를 치면 노총위원장이 “나이스 샷”이라고 환호를 보낸다. 운동을 마친 이들은 함께 밥을 먹는다. 서로 허물없이 어울리다 보면 노사정 간의 갈등은 생길 수 없다.

# 문재인정부의 첫 고용노동부 장관 김영주가 맨 먼저 달려간 곳은 한국노총이었다. 취임 일주일 만에 노총을 찾은 그의 일성은 “친정에 온 것 같다”였다. 사용자 단체인 경총을 방문한 것은 노동자 단체를 찾은 지 보름 지나서였다. 다른 기관을 죽 들른 뒤 마지막 순서로 경총을 끼워 넣었다. 경총이 적폐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경총에 반성을 촉구했고, 뒤이어 노조원들은 경총으로 몰려가 “노동 적폐의 온상 경총은 해체하라”고 소리쳤다.
배연국 논설실장

기업을 대하는 양국의 상반된 태도는 국가경제의 명암을 갈랐다. 아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싱가포르는 1인당 국민소득이 우리의 두 배나 된다. 국가경쟁력 세계 3위에 실업률이 2%로 완전고용 상태다. ‘작지만 큰 나라’의 위상이 느껴진다. 싱가포르보다 국토 면적이 140배나 큰 대한민국은 갈수록 작아지고 있다. 경제성장은 뒷걸음질치고 고용 사정은 외환위기 이후 최악이다. 1인당 국민소득은 2만달러대에서 12년째 제자리걸음이다.

싱가포르 노사정이 매주 골프를 치지만 목적은 골프가 아니다. 노사 스킨십을 통해 일자리라는 공동선(共同善)을 이루기 위함이다. 정부는 원활한 소통이 이뤄지도록 멍석을 깔아주는 역할을 한다. 한국이라면 이런 모습을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적폐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워낙 강한 까닭이다. 부유층, 기업인, 그리고 이들이 즐기는 골프엔 적폐의 딱지가 붙었다. 적폐의 기업인과 어울려 적폐의 운동을 즐겼다가는 공적 1호로 몰리기 십상이다.

대통령도 뒤늦게 인정했듯이 좋은 일자리를 만드는 주체는 기업이다. 그 기업을 지탱하는 두 기둥은 노동자와 사용자임은 두말할 것이 없다. 노사의 두 기둥이 튼실해야 기업의 지속적인 성장도 가능하다. 한쪽의 선만 고집하면 기업의 공동선은 무너진다. 일전에 현대자동차 임원이 어떤 장관에게 전기자동차 등에 대한 규제 완화를 요청했다가 “그거 현대만 좋아지는 거 아니에요?”라는 핀잔을 들었다고 한다. ‘기업=사용자=적폐’라는 잘못된 도식에서 생겨난 협량적 인식이다. 이런 삐뚤어진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 2년간 최저임금 29% 인상이란 ‘반기업 괴물’이고, 기업 투자의 ‘탈코리아’ 행렬이다.

기업과 기업인은 존중받아야 한다. 그 이유는 기업을 짓밟고선 경제성장과 고용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경제 호황을 누리는 국가에선 하나같이 기업을 떠받든다. 가까운 일본은 경제단체 대표가 총리와 수시로 만나 머리를 맞댄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다른 나라에는 갑질을 해도 자국 기업에는 을의 자세를 취한다. 그는 지난여름 휴가 중인데도 기업 대표들을 골프클럽으로 초대해 식사를 대접했다. 선진국뿐이 아니다. 경제 우등생으로 떠오른 베트남은 삼성전자를 유치하면서 부지를 공짜로 주고 법인세를 4년간 면제했다. 전무급인 한국인 공장장은 요청만 하면 언제든 최고통치자를 만날 수 있다. 우리처럼 정상회담 때 기업인을 들러리로 세우고 국정감사장에 불러 호통치는 짓은 하지 않는다.

정부가 삼성 등 8대 그룹에 투자·고용 이행계획을 제출하라고 요구했다는 소리가 들린다. 투자는 기업이 시장 여건을 따져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다. 기업에 온갖 족쇄를 채워놓고 빨리 뛰라고 채근하는 것은 이율배반이자 갑질의 전형이다.

기업 투자는 흐르는 물과 같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투자 역시 기업 환경이 좋은 곳으로 모이게 마련이다. 권력이 기업에 낮은 자세로 대하면 투자의 물길은 자연히 열릴 것이다. 그 대전제가 ‘권력 갑질’의 신적폐를 청산하는 일이다.

배연국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