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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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교칼럼] 우리 시대의 가무

진정성과 열정 가득한 무대 / 세계 사로잡은 방탄소년단 / 群舞·群歌·신명 넘쳐나는 / 우리의 전통 그대로 보여줘
방탄소년단의 뉴스를 들으면서 우리나라는 확실히 가무(歌舞)의 나라임을 실감한다. 가무의 나라란, 노래는 항상 춤과 어울리며 춤은 반드시 노래와 어울리는 그러면서 1인의 노래가 아닌 다중의 노래가 축제성을 지니고 있는 나라라는 뜻일 것이다.

삼국시대는 가무의 화려함으로 우리의 역사를 장식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남은 향가는 춤이 곁들여졌던 노래, 혹은 춤과 노래가 함께 어울리던 노래였다. 아마 처용가(處容歌)의 처용은 춤추며 신라의 밤길을 돌아다니다가, 요즘 말로 하자면 파티라든가 축제에 참여했다가 돌아와 아내의 부정을 발견했을 것이다. 가야의 구지가(龜旨歌) 같은 것에서도 구간(九竿)들이 땅을 치며 노래했다는 기록을 보면 그것은 춤과 곁들여진 노동의 노래였으리라고 생각된다. 무가는 아직도 춤과 노래가 곁들여져 실연(實演)되고 있다.
강은교 동아대 명예교수 시인

그런데 이렇게 노래와 춤이 함께 어울린다는 특징 외에 우리 가무의 또 하나의 특징은 그것이 군무(群舞)이며 군가(群歌), 그리고 축제성 즉흥 또는 신명을 지닌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혼자 노래부르거나 혼자 춤추는 게 아니라 여럿이 함께 노래하고 춤추면서 축제성의 열정을 내뿜는 것이다.

이 전통은 근대에 이르러 서양음악의 흡입으로 가무성, 다중성, 축제성이라는 우리 노래만의 특징을 잃게 되었고, 노래와 춤은 서로 확연히 다른 장르로 분리됐다. 1인의 연주라는 형식, 소위 콘서트가 하나의 음악행위로 자리 잡게 됐다. 여러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아마도 우리 가무의 특징인 군가성, 군무성, 다중성, 그리고 그 축제성 때문에 1인의 연주형식, 가무가 분리된 서양 노래의 영향을 듬뿍 받은 노래는 민중 속에서 확장되지 못한 채 성악이라는 이름으로 고급음악의 한 장르 속에 편입돼 존재하게 됐을 것이다.

무가만 하더라도 주무당의 노래나 사설을 보조무당이 반복하거나 하는 방법으로 받쳐 주면서 주무당과 보조무당이 함께 실연하게 돼 있지 않은가. 다시 말하면 가무가 같이 노래되고 춤추어질 뿐만 아니라 홀로 하는 연주가 아닌 여럿이 함께하는 실연이 많다는 점에서 방탄소년단의 노래는 그냥 서양노래로서 나타난 것만은 아닌 게 분명하다.

가무성, 군무성, 군가성, 그리고 축제의 열정성을 방탄소년단의 노래들은 지니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노래에는 우리의 전통이 탄탄하게 그 기초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어찌 보면 대중의 시대, 민중의 시대, 나아가 민주의 시대인 현대에서 우리 노래의 힘을 세계에 받아들여지게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어떤 서구 관객이 ‘왜 방탄소년단의 노래를 좋아하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열정’이라는 한마디로 대답한 것처럼 바로 가무성, 군무성, 군가성, 그리고 축제의 열정성이 빚어내는 그 열정 때문일 것이다.

노래가 없어지는 시대, 그것도 ‘군가’가 없어지는 시대, 군가를 되살리는 일이 우리의 젊은이들에 의해 나타나고 있다. 이제 그러한 우리의 전통은 막대한 상업적 이익까지 끌어들이며 우리를 세계에 알리고 있는 것이다.

플라톤의 말이 생각난다. “이 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다고. 말할 것은 이미 다 말하여졌다”고. 나는 이 말을 방탄소년단의 가무와 군무에도 적용하고 싶다. 이미 불려진 노래에서 다시 노래는 흘러나오는 것이라고.

방탄소년단의 노래가 서양노래라고만 생각하지 말자. 우리는 식민지 시절 이후 우리 자신을 너무 홀대하고 있다. 서양적인 것이 우월한 것으로 항상 생각되고 있다. 우리 스스로 그 점을 이미지화해서 우리 스스로를 세뇌한다고나 할는지. 우리가 가진 것, 그것이 결국 우리를 세계적으로 살릴 것이다. 그 이유는 가장 우리적이므로 진정성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성은 열정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진정성은 가장 자기다운 열정이다. 다시 말하면 그 소년들의 노래엔 진정성과 그것의 다른 이름인 열정의 힘이 절규 아닌 절규를 서양을 향해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강은교 동아대 명예교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