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선거 한류’ 외치며 독재국가에 원조 강행, “타당성 원천 재검토해야”

기사입력 2018-10-19 14:12:05
기사수정 2018-10-25 16:39:12
+ -
지난 8월9일 한국에 거주하는 콩고민주공화국(DR콩고)의 시민단체 ‘프리덤 파이터(freedom fighters)’가 중앙선거관리위원회를 방문해 올해 12월23일에 실시하는 DR콩고 대선에 한국기업 ‘미루시스템즈’의 터치스크린 투표시스템(TVS)이 도입되는 것을 막아달라고 요청했다. 정세가 불안한 가운데 진행되는 DR콩고의 대선에서 부정선거를 위한 도구로 악용될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19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권미혁 의원(더불어민주당)이 선관위로부터 ‘세계선거기관협의회(A-WEB) ODA 사업 감사결과 관련 자료’를 제출받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공적개발원조(ODA) 형태로 진행된 해당 사업이 당시 선관위 사무총장의 개인적 일탈이 아닌, 선관위 전현직 직원이 총동원된 결과인 것으로 나타났다.


국제개발협력민간협의회에 따르면 2016년 3월 A-WEB과 DR콩고 선관위(CENI)는 ‘전자투·개표 장비 개발·보급’과 관련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같은달 한국 선관위는 2017년도 ODA 사업의 일환으로 A-WEB을 통해 ‘한국선거제도 해외전파(5개국 선거기관 선진화 사업 지원)’ 사업계획을 수립했다. 이 중 DR콩고에는 데이터센터 및 선거정보시스템 고도화 등 선거 ICT 선진화 지원계획이 포함됐다. 이 당시 책정된 사업비는 38억원이었다.

A-WEB은 선관위 주도로 2013년 10월 출범한 민간기구로 2016년까지 선관위 사무총장을 지낸 김용희씨가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같은 해 5월 외교부는 ODA사업 심사 과정에서 현지 정세불안 등을 이유로 해당 사업을 탈락시키고 유권자명부시스템 개선 및 데이터센터 고도화사업만 지원하기로 한다. 이에 대한 사업비는 9억3000만원이었다.


이에 A-WEB 김 사무총장은 ODA사업 수행과 별개로 CENI와 미루시스템즈 간에 1700억원(10만6000대) 상당의 TVS 계약을 알선했다. 선관위는 이에 대해 A-WEB이 미루시스템즈의 영업활동을 지원했다고 판단했으나, A-WEB은 지난 10년간 TVS를 생산하는 업체가 미루시스템즈 단 한 곳뿐이었기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올해 2월 CENI는 미루시스템즈와 직접 단말기 공급계약을 맺고 전자투표시스템을 포함한 국가예산의 10%(5억달러·약 5600억원)를 선거에 배정했다.

논란이 확산하자 김대년 선관위 사무총장은 3월 A-WEB의 ODA 사업을 내부 감사한 뒤 입찰 방해, 업무상 배임 등의 혐의로 올해 3월 김용희 A-WEB 사무총장을 검찰에 수사의뢰했다. 현 선관위 사무총장이 전 사무총장을 수사의뢰한 것이다.


올해 4월에는 주DR콩고 한국대사관이 전자투표시스템으로 인해 민주적 선거가 방해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 또 김대년 선관위 사무총장은 지난달 이번 사건에 도의적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국제사회의 비난도 적지 않았다. 니키 헤일리 유엔 미국대사는 올해 2월 유엔안전보장이사회 비공식회의에서 DR콩고의 전자투표시스템 도입을 반대하고 종이투표를 촉구하기도 했다. 올해 7월에는 한국에 거주 중인 30여명의 콩고인이 판교 테크노벨리에 있는 미루시스템즈 본사 인근에서 항의 집회를 열었다.

이러한 가운데 김 A-WEB 사무총장의 혐의 외에도 다른 직원들이 관련된 조직적인 행위가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권미혁 의원실이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선관위 전문임기제 가급으로 재직했던 김모씨는 2015∼2017년 에콰도르, 엘살바도르, 피지 등을 대상으로 50억원의 사업을 수주받는 과정에서 미루시스템즈로부터 향응수수로 경찰 수사를 받았다.


권 의원은 “이 김모씨는 김용희 A-WEB 사무총장이 2006년 전차선거추진단장이던 시절 특채로 뽑았던 직원”이라며 “선관위는 미루시스템즈와 컨소시엄을 구성했던 업체 직원을 ODA 사업 중에 채용한 점과 용역계약파견업체 직원을 해당 ODA 사업에 참여시킨 점 등을 들어 직무 수행을 현저히 저해했다고 감사 결과에서 판단했다”고 밝혔다.

DR콩고에 전자투표시스템이 도입되는 것에 대해 우려가 컸던 가장 큰 이유는 부정선거에 이용될 가능성 때문이었다.

DR콩고의 대통령인 조제프 카빌라는 2001년 취임 이후 2006년과 2011년 두 번 연임에 성공하며 17년째 집권 중이다. 대통령 임기가 2016년 끝났음에도 대선을 계속 연기하며 대통령직을 이어오고 있는 셈이다. 이로 인해 국민불만이 커지면서 퇴진 시위가 잇따르자 카빌라 정권은 이를 강제진압했고, 1000여명 이상이 숨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올해 12월로 예정된 대선 또한 지난해 12월 예정이었던 것이 연기된 결과이다.

2001년 DR콩고 대선에서도 투표용지 분실, 투표용지 배송 지연 등의 부정선거 의혹이 제기된 바 있다.

전자개표기기에 대한 불신도 있다. 과거 미루시스템즈가 공급한 기기를 사용해 이라크 총선을 전자개표하는 과정에서 부정행위의혹으로 수작업 개표를 시행한 결과 당선자 변동률이 25%에 달했다.

기기의 신뢰성 여부와 관계없이 이미 부정선거에 대한 우려가 큰 국가에서 굳이 전자투표기를 도입하게 될 경우 부정선거 및 선거조작 등에 대한 우려가 더욱 커질 수 있고, 결과적으로 내정이 더욱 불안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A-WEB은 한국 선거제도의 해외 전파, 즉 ‘선거 한류’를 내세우며 독재정권에 전자투표 기반을 조성하려 한 것이었다.

향후 정부 기관이 ODA 사업을 추진할 때에는 충분한 조사를 통해 현지 사정을 파악하는 한편 사업의 영향까지 면밀히 검토하는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국제개발협력민간협의회 관계자는 “ODA 사업으로 시작됐고 한국 기업이 개입된 만큼 이번 사안에 대한 정부의 책임있는 조치가 필요하다”며 “이번 사업에 대한 타당성을 재검토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최근 DR콩고 대선을 앞두고 이를 위해 필요한 전자투표기 10만여대가 수출을 위해 선적이 마무리된 것으로 전해졌다.

김준영 기자 papenique@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