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기대됐던 공동성명은 발표되지 않았다. 그 이유를 놓고 각국 언론은 설왕설래를 내놓고 있다. 일본 요미우리 신문은 21일 자체 입수한 EU 측 공동성명 초안을 소개하며 한·EU정상회담에서 공동성명 채택이 무산된 것은 ‘북한 핵 문제에 대한 온도 차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신문에 따르면 초안에는 북한에 대해 ‘우리는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를 계속 요구해 갈 것’이라는 표현과 함께 ‘압력과 제재 유지를 위해 힘쓰고, 모든 국가가 유엔 안보리 결의를 완전히 이행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고 명시돼 있었다는 것. 또 신문은 EU 소식통을 인용해 한국 측이 최근 남북관계 및 북미 정상회담 등을 고려해 “비핵화를 위한 지금까지의 성과에 역점을 둔 성명으로 하고 싶다”고 했고, 결국 제재 유지를 강조하려는 EU 측과 절충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전했다.
한국 정부로서는 한반도 비핵화 협상 과정에 미국·러시아와 공조 체제를 유지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EU의 요구를 수용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미국은 국제사회와 이란이 합의한 이란 핵 협정에서 올해 5월 일방 탈퇴했고, 러시아는 지난 2014년 우크라이나 내분사태에 무력으로 개입하고 크림반도를 강제병합해 각각 EU와 마찰을 빚고 있다.
이 같은 내용은 한국 정부의 브리핑에선 빠졌다. 특히 쇠고기 시장 개방 문제와 관련, EU는 그동안 ‘한국이 미국, 캐나다산 쇠고기 수입은 허용하면서 EU산 쇠고기 수입을 계속 불허하는 것은 과도한 조치’라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제기해왔다. 한국 정부는 쇠고기 수입을 위한 정부 차원의 절차는 마무리됐고 국회에서 심의 중이라며 양해를 구해왔지만, EU는 수입개방을 늦추기 위한 ‘꼼수’로 받아들이는 상황이다.
중국이 프랑스와 네덜란드 등 일부 EU 회원국 쇠고기 수입을 결정하면서 한국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반면 청와대 브리핑에선 EU의 철강제품 수입제한조치인 세이프가드 발동과 관련, 문 대통령이 한국산 철강제품의 적용 예외를 요구했다고 밝혔으나 EU 측 자료에선 소개되지 않았다.
EU의 복잡한 의사결정 구조가 이유라는 분석도 있다. 공동성명에 담길 내용에 대해 양측 간 충분한 협의가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란 관측이다. EU의 의사결정 구조를 보면, 경제적 사안의 경우 행정부 격인 집행위원회에 많은 재량권이 있지만 외교적 사안에 대해선 집행위와 대외관계청(EEAS)이 대표로 나서 협의한 뒤에는 일일이 회원국 정부의 동의를 구하는 절차를 밟아야 한다.
이런 데다가 이번 한·EU 정상회담의 경우 아시아와 유럽 정상들이 참여하는 아셈 정상회의과 겹치면서 EU 측으로선 한국과 현안을 놓고 집중적인 조율을 할 여건이 되지 못했다는 지적도 있다. 브뤼셀 외교가에서는 문 대통령이 이번에 EU를 공식 방문한 게 아니라 아셈 정상회의 참석을 계기로 EU와 정상회담을 가진 것이기 때문에 공동성명을 채택해야 한다는 외교적 부담이 크지 않았던 점도 공동성명이 발표되지 않은 이유로 작용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실제 문 대통령은 프랑스, 이탈리아를 방문해 가진 정상회담에선 공동선언을 발표했으나 아셈 정상회의 참석을 계기로 브뤼셀에서 가진 독일, 영국과 가진 정상회담에선 공동선언이나 공동성명을 내놓지 않았다.
한편, 이번 아셈 정상회의와 한·EU 정상회담에선 한국과 EU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들도 여럿 있었다. 먼저 아셈 정상회의를 주재한 도날트 투스크 EU정상회의 상임의장이 첫날 개막식 갈라 만찬에서 문 대통령을 자신과 벨기에 필리페 국왕이 앉은 헤드테이블에 자리를 마련했다. 또 투스크 의장은 피아니스트 임동혁씨를 직접 뽑아 만찬에서 연주하게 함으로써 참석자들이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갖도록 배려했다는 후문이다.
페데리카 모게리니 EU 외교·안보 고위대표는 아셈 정상회의 폐막 기자회견에서 최근 한반도 사태와 관련, “한반도 뿐만 아니라 아시아와 전 세계에 새로운 희망을 불러온 문재인 대통령과 강경화 외교장관의 리더십을 높게 평가하고 감사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EU 측은 한·EU 정상회의 보도자료에서 EU는 한반도 문제와 관련, 세 차례의 남북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을 거론하며 한국 정부의 노력과 외교적 이니셔티브, 회담 결과물에 대한 이행을 지지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조현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