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각국에서 육아 비용이 많이 증가하고 있다. 게다가 혼외 출산이나 이혼, 한부모 가정도 급증하고 있고, 결혼한 여성이 일하는 비율도 증가하고 있다.
21일(현지시간) 미 연방 센서스국과 조셉 차미 전 유엔 인구국장이 최근 미국 언론에 기고한 내용에 따르면 조부모가 자녀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손자·손녀의 육아를 책임지는 현상이 글로벌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다. 육아 비용이 치솟는데도 수입은 제한돼 있어 자녀가 일을 계속하려면 조부모가 육아를 담당하는 게 가장 경제적인 선택이기 마련이다. 특히 싱글 맘이 일하거나 경력 단절을 피하려면 조부모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영국에서는 조부모가 부모 대신 육아를 책임짐으로써 연간 700억달러(약 79조원)의 육아 비용이 절감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호주는 조부모 육아로 연간 20억달러가량의 비용이 줄어든다고 차미 전 국장이 주장했다.
중국, 멕시코, 나이지리아, 몰도바 등 개도국에서는 부모가 돈을 벌기 위해 자녀와 떨어져 사는 사례가 많다. 부모 또는 그중의 한 사람이 농촌 지역에서 도시로 돈을 벌려고 따로 살거나 다른 나라에서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기도 한다. 이런 가정에서는 조부모가 육아를 책임지는 비율이 현저히 올라간다. 경제난과 주택난도 조부모 육아를 부채질하고 있다. 미국에서 2007∼2008년 대침체기를 지나면서 한 세대 만에 조부모, 부모, 자녀 등 3대가 한 집에 거주하는 비율이 3분의 1가량 증가한 것으로 조사됐다.
세계 각국에서 전체 국민 중 조부모가 차지하는 비율은 나라별로 차이가 크다. 출산율, 평균수명 등이 조부모 비율을 결정하는 주요 요인이다. 조부모 비율이 전체 인구의 15%에 미치지 못하는 국가는 케냐, 파키스탄, 나이지리아, 에티오피아 등이다. 조부모 비율이 15∼20%인 국가는 중국, 독일, 인도 등이다. 또 조부모 비율이 20∼25%인 국가는 인도네시아, 브라질, 영국, 이탈리아, 캐나다, 미국, 베트남, 프랑스 등이다. 조부모 비율이 25∼30%에 이르는 국가는 코스타리카, 우크라이나, 일본, 러시아 등이다. 전 세계적으로 보면 손자 또는 손녀가 있는 할머니는 8억명, 할아버지는 5억8000만명가량이고, 그 나머지가 62억5000만명가량이다.
자녀가 없는 남성이나 여성이 많은 국가는 자연스럽게 조부모의 비율이 낮아질 수밖에 없다. 개발도상국인 인도,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남아프리카공화국, 터키에서 40대 후반 여성 중 자녀가 없는 비율은 5% 미만인 것으로 집계됐다고 차미 전 국장이 밝혔다. 그렇지만 선진국인 오스트리아, 캐나다, 핀란드, 스페인, 영국, 미국에서 50대에 진입하는 여성 중에서 자녀가 없는 비율은 20%가량에 이른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는 데는 첫아이 출산이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한 것으로 조사됐다. 선진국인 캐나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 네덜란드, 스위스에서 여성이 첫 아이를 출산하는 나이는 평균 30세에 가깝다. 이 때문에 이들 국가에서는 여성이 60대가 이르러서야 할머니가 되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개도국인 방글라데시, 니제르, 차드, 잠비아, 말리 등에서 여성이 첫아이를 출산하는 평균 연령은 20세 미만이다. 이들 국가 여성은 대체로 40세 안팎에 할머니가 된다.
조부모가 자녀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손자·손녀의 육아를 책임지는 현상이 글로벌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다.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가운데)는 흑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의 이혼으로 어린 시절 외조부모와 함께 생활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
유럽의 선진국에서는 평균수명이 늘어나면서 손자·손녀와 함께 거주하는 비율이 그만큼 증가하고 있다. 스위스에서는 10대 청소년의 96%가 조부모 또는 그중의 한 명이 생존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또 스위스에서 30대 연령층 중 최소한 한 명의 조부모가 생존해 있는 비율이 39%에 이른 것으로 드러났다.
스위스 라이프 그룹 조사에 따르면 유럽 대부분의 국가에서 조부모 중 20∼30%가량이 경제 활동을 하고, 자녀와 손자·손녀를 경제적으로 지원할 능력이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독일에서는 2014년을 기준으로 조부모의 28%가 손자·손녀를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1996년에 비해 2배가량 늘어난 것이다. 중·북유럽에서 조부모가 손자·손녀를 돌보는 시간은 연평균 240∼360시간가량이나 이탈리아에서는 730시간, 그리스에서는 960시간에 이른다.
조부모가 손자·손녀에게 방과 후에 공부를 가르치는 등 돈으로 계산할 수 있는 지원을 하기도 한다. 유럽에서는 이 때문에 조부모의 경제적 기여도를 평가하는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세계 각국이 어버이의 날, 어머니의 날, 아버지의 날을 제정해 기념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가정에서 조부모가 육아를 책임지는 등 그 역할이 늘어나고, 위상이 올라감에 따라 할머니·할아버지의 날을 제정해 기념하는 국가가 늘어나고 있다. 호주, 캐나다, 에스토니아,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멕시코, 파키스탄, 폴란드, 싱가포르, 스페인, 영국, 미국 등이 조부모의 날을 기념하는 대표적인 국가이다.
조부모는 가정 경제의 윤활유 역할을 한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이다. 살림살이가 빡빡한 현실 속에서 조부모가 육아를 책임지면 가정 경제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자녀의 정서에도 도움이 된다. 할머니·할아버지도 손자·손녀 육아에 참여함으로써 자녀와 함께 한집에서 거주하면서 정서적 안정을 찾고, 육아에서 오는 보람을 느끼게 된다.
그렇지만 조부모는 시간이 흘러가면서 노쇠기를 맞는다. 육체적으로 육아를 감당하기 어렵고, 오히려 자녀 또는 손자·손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시간이 오게 돼 있다. 노인을 보살피는 데도 많은 돈이 들 수 있으나 노인이 다세대 가정에 거주하면 이 비용이 줄어들 수 있다. 노인이 나이가 많아질수록 자녀 거주지 또는 그 인근으로 거처를 옮기는 것도 일반적인 현상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30개 부유한 국가에서 자녀 육아에 쓰는 평균 금액은 2016년 기준으로 전체 수입의 15%가량인 것으로 나타났다고 CNN이 최근 보도했다. 미국의 부모는 가계 수입의 25.6%를 육아 비용으로 지출하고 있다. 그렇지만 한부모 가정에서는 그 비율이 52.7%로 올라간다. 미국에서 취학 이전 연령의 자녀를 보육 시설에 맡기면 2016년 기준으로 연평균 9589달러(약 1086만원)가 든다고 CNN이 전했다. 이는 공립대학 평균 학비 9410달러(약 1066만원)보다 많은 금액이다.
유럽 국가는 대체로 미취학 아동의 보육을 정부가 지원해준다. 덴마크에서 부부가 육아에 사용하는 비용은 전체 수입의 10.7%가량이다. 그렇지만 한부모 가정에서는 정부의 지원금 증가로 그 비율이 2.9%로 떨어진다. 정부가 보육비를 지원하는 비율이 낮은 국가일수록 조부모가 육아에 참여하는 비율이 올라간다고 이 방송이 지적했다. 세계적으로 가난한 나라에서는 조부모보다 나이가 많은 자녀가 동생을 돌보는 게 일반적이다.
워싱턴=국기연 특파원 ku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