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토니아 탈린 올드타운은 유럽의 중세도시를 그대로 박제한 듯한 곳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
영어로 던진 간단한 질문이지만, 머리가 희끗희끗한 백발의 노인은 머뭇거리더니, 말 대신 손가락 몇 개를 펴들었다.
정확하게 답을 얻기 위해 옆에 있던 통역사 엘리나에게 통역을 요청했다. 그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대화를 나눴고, 엘리나는 “가방 가격은 10유로”라고 얘기했다. 나이 지긋한 이들이 자신보다 더 나이 들어 보이는 물품들을 좌판에 펼쳐놓고 손님을 맞고 있다. 외국인들은 주로 영어로 물어보지만, 돌아오는 답은 손가락 또는 종이에 숫자를 쓰는 방식이다.
“나이 많은 분들은 대부분 영어를 거의 못해요. 러시아 말을 하죠. 가방 판매한 사람과도 러시아말로 대화했어요.”
소련 시절 흔적은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의 오래된 건물과 사람들의 모습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좀 오래됐다 싶은 건축물들은 대부분 소련 시절 지어진 것이다. 러시아 군인 모자, 스탈린 버튼 등 소련 시절 물품을 좌판에 내놓고 파는 이들도 곳곳에서 눈에 띈다.
올드타운의 ‘올데 한자’는 중세 분위기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 중 하나다. |
◆아픈 흔적에서 피어난 디지털 최강국
1991년 소련에서 독립한 에스토니아는 신생국이다. 문화의 뿌리는 사실상 수백년간 통치한 외세의 영향으로 이뤄졌다고 봐야 한다. 서유럽과 러시아를 잇는 동서 무역 거점에 위치해 언제나 외세의 침략 대상이 됐다.
탈린 올드타운의 돼지 동상. |
지금의 에스토니아 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친 나라는 러시아다. 수도 탈린에도 소련 점령 때 지은 우중충한 분위기의 건물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겉모습만 보면 흉물처럼 느껴지지만, 그 안에는 변화하는 에스토니아만의 현재가 꿈틀대고 있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지역이 탈린의 텔리스키비다. 현지어로 ‘벽돌’이란 의미의 장소로, 소련 시절부터 있던 공장지대다. 검붉은 벽돌로 쌓은 오래된 건물들이 무미건조하게 있지만, 그 안에 들어가면 살아있는 현재의 에스토니아를 들여다볼 수 있다.
올드타운은 탈린에서 가장 인기있는 여행지다. 다양한 거리 공연이 열린다. |
1940년대부터 집단노동을 하던 이 건물들은 에스토니아 독립 후 방치됐다.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으니 젊은이들, 음악을 하던 이들이 자리를 잡고, 자신들만의 공연을 하면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단조롭던 외벽엔 다양한 벽화들이 그려져 건물의 무미건조함을 날려버렸다.
이 건물 중 한 곳에 2010년 ‘에프-호네(F-hoone)’란 식당이 들어서면서부터 탈린의 ‘핫플레이스’가 됐다. 공장의 외관은 그대로 살리면서 내부는 독특한 분위기로 꾸민 이 식당이 유명해지면서 카페, 디자인숍들이 빈 공장 건물을 차지했다. 이곳부터 걸어서 10분 정도 떨어진 탈린역이 있는 발티얌까지 기차를 개조한 카페, 주유소를 리모델링한 상점 등과 중고물품을 파는 빈티지 시장이 있다. 공장 건물들을 젊은이들이 차지했다면, 벼룩시장 같은 빈티지 시장은 노인들의 차지다.
식당이나 카페의 메뉴는 에스토니아어 외에 영어도 표기돼 있다. 러시아어는 찾기 힘들다. 젊은이들은 이제 러시아어를 배우지 않고, 영어를 한다. 에스토니아어와 영어만 쓰는 젊은 층, 소련 시절 러시아어만 사용해 다른 언어를 못하는 일부 노인들이 섞여 현재의 탈린을 그리고 있다.
올드타운 고지대의 매력은 전망이다. 주황빛 지붕이 솟아있는 올드타운 건물들을 내려다볼 수 있다. |
탈린의 대표적인 관광지 올드타운 근처 도심에는 소련 때 건물과 독립 후 지은 세련된 건물들이 뒤섞여 있다. 암울했던 과거의 흔적이 도시 곳곳에 남아 있는 것이다. 아픈 흔적을 지울 법도 하지만 이들은 외형을 바꾸기보다는 내실을 키웠다. 영토는 남한의 절반도 안 되고, 인구는 130만명 정도의 약소국이지만 디지털 세계에선 세계 최강국이다. 오래된 건물엔 정보기술(IT) 기업들이 들어찼다. 인터넷 전화기업 스카이프부터 세계 최대 개인 간(P2P) 해외 송금 업체 트랜스퍼와이즈도 에스토니아인이 창업했다. 국가 행정에 종이 문서를 사용하지 않고 디지털화된 전자문서를 사용한다. 공직 선거에 전자투표도 도입했다. 하드웨어를 치장하기보다 소프트웨어를 키우는 데 집중한 이들은 독립한 지 30년도 안 돼 신생국이란 딱지를 떼고 스타트업 기업의 성지가 됐다. 이 IT기업들이 바로 소련 시절의 흔적인 허름한 공장에서 시작한 것이다.
◆실재하던 중세의 모습이 그대로
현재의 변화하는 모습을 도심의 건물들을 통해 느낄 수 있다면, 올드타운은 시간 여행의 장소다. 타임머신을 개발해 중세 유럽으로 간다면 탈린의 올드타운 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 듯싶다. 유럽의 중세도시를 그대로 박제한 듯한 곳이 바로 올드타운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에스토니아 탈린 올드타운 입구에는 꽃가게가 많다. 다른 상점들은 문을 닫아도, 꽃가게들은 24시간 영업을 한다. |
게이트를 통과하면 높은 담벼락, 꼬깔콘 모양의 주황빛 지붕탑, 거기에 높은 성당의 첨탑 등 중세 시대 분위기의 건물들이 이어진다.
중세 분위기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은 ‘올데 한자’다. 12, 13세기 독일 상인들의 주도로 발트해 연안 도시들이 상업 목적으로 결성한 도시 동맹인 ‘한자 동맹’ 당시 상인들이 사용했던 건물이다. 레스토랑으로 사용되는데, 최대한 중세 분위기를 살리려 전기를 쓰지 않고, 초로 실내를 밝힌다. 직원들의 복장도 당연히 중세식이고, 3층 화장실은 나무 변기 등을 사용해 최대한 과거의 모습을 복원했다. 음식도 다른 식당에서 접하기 힘든 멧돼지고기, 곰고기 등이 나온다. 의미가 명확하진 않지만 한국어 메뉴판도 있다.
올드타운의 광장 야경. |
‘올데 한자’를 지나면 옛 시청사가 있는 광장을 만난다. 벨기에 브뤼셀의 ‘그랑플라스’처럼 사각형태로 건물들이 광장을 둘러싸고 있다. 광장 한편엔 1422년부터 한자리에서 영업을 한 약국 ‘레아프테크’도 만날 수 있다. 현재도 약을 판매하는데, 과거에 판매한 약초들도 전시돼 있다. 이 외에도 오래된 디저트카페, 아기자기한 소품 가게들이 많아 둘러보는데 하루가 벅찰 정도다. 또 러시아의 대문호 표도르 도스토옙스키가 머물렀던 집, 유명한 예언가가 무료로 점을 봐주는 집 등 특징 있는 장소들도 구석구석 있다. 골목골목 돌아다녀야 돼 체력 조절을 잘해야 한다. 저지대가 끝이 아니라 고지대에도 올라가야 한다.
탈린 올드타운에서 남쪽으로 20∼30분 차로 가면 만나는 패스큘라습지는 자연을 만끽하며 거닐기 좋다. |
고지대에 가려면 툼페아 언덕을 오르면 된다. 말이 고지대지 5분이면 전망대에 이른다. 탈린 자체에 높은 곳이 거의 없다. 탈린의 평균 고도는 해발 50m 정도로, 언덕만 올라도 조망이 좋다. 언덕에 오르면 검은 돔 위의 황금 십자가가 있는 정교회 성당이 눈에 들어온다. 저지대보다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더 강하다. 이런 분위기 외에도 고지대의 매력은 전망이다. 코투오차와 파트쿨리 전망대에서 올드타운을 내려다볼 수 있다. 주황빛 지붕이 솟아있는 올드타운 건물들 너머 펼쳐진 푸른 바다까지 교회의 첨탑들 빼고는 시야를 가리는 것들이 거의 없다. 올드타운을 돌아보고 비루게이트로 나오면 성벽 위를 걸어 올라갈 수 있는 곳이 나온다. 3유로를 내면 오를 수 있는데, 4.7㎞에 이르는 성벽의 일부를 가까이서 볼 수 있다.
텔리스키비 공장 건물에 그려진 벽화. |
탈린 외곽에는 습지대가 발달해 있다. 국토의 절반이 숲으로 이뤄진 에스토니아다. 올드타운에서 남쪽으로 20∼30분 차로 가면 만나는 패스큘라습지는 자연을 만끽하며 거닐기 좋다. 숲 중간의 전망대에서 수평선을 볼 수 있다. 바다나 호수가 그리는 수평선이 아니라 끝없이 펼쳐진 나무들이 만든 수(樹)평선이 펼쳐진다.
탈린(에스토니아)=글·사진 이귀전 기자 frei5922@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