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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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 문화 향유는 지자체의 의무" 가난한 예술가들에 작업공간 제공 [젠트리피케이션 넘어 상생으로]

파리 위성도시 이시레물리노 / 한때 버려진 도시… 대기업 입주로 활기 / 교각아치 활용한 작업실 관광명소 부상

“젊은이들이 문화를 영위하고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프랑스 파리의 위성도시 이시레물리노의 필리프 크뉘스만 도시계획부시장과 알랭 레비 국제관계부시장은 그들이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이유에 대해 한목소리로 답했다.

이시레물리노는 프랑스에서도 독특한 역사를 가진 도시다. 18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시레물리노는 한마디로 쓰레기 하치장이었다. 파리에서 나오는 갖가지 오염·유해물질을 버리는 장소가 이 지역이었다. 2차 세계대전 때는 무기 제조 공장, 염색·잉크 등 유해 화학공장 등 파리에 입주할 수 없는 공장들이 이 지역에 들어섰다. 종전 후에는 수요가 줄어 공장은 그대로 버려졌고, 도시에서 내뿜는 매연과 유해물질 등이 늘자 결국 주민들은 도시를 떠났다.

버려진 도시나 다름없던 이시레물리노가 변한 것은 1980년대부터다. 파리에 붙어있는 도시라는 지리적 요인을 최대한 활용했다. 버려진 공장을 기업 사무실로 바꾸고, 유해물질이 차있던 곳을 녹지 공간으로 변화시켰다. 버려진 도시라는 악명은 순식간에 잊히고, 파리에서 나온 기업들이 앞다퉈 들어오자 일자리가 늘어 인구가 증가하는 등 상전벽해와 같은 변화를 겪었다. 기업들이 몰리자 땅값과 임대료가 파리에서 가장 비싼 중심지역(1∼3구)과 비슷한 수준까지 올랐다.

이시레물리노는 도시를 관통하는 기찻길 교각 아치 형태의 공간에 예술가들을 위한 27개의 작업실을 만들었다. 교각 공간을 활용한 색다른 시설이다보니 이를 보러 오는 이들도 많다.


이런 변화 속에서도 이시레물리노는 예술가에 대한 지원을 지속했다. 비싼 임대료를 내기 힘든 예술가들을 위해 저렴한 임대료만 내고도 활동할 수 있도록 전폭적으로 지원한 것이다. 1990년대부터 정부 소유의 옛 탱크 정비 공장을 예술가들을 위한 장소로 제공했다. 좋은 환경은 아니지만, 예술가들은 공장부지를 작업실, 전시관 등으로 활용하며 작품활동을 했다.

2000년대 들어 입주 기업이 늘자 시는 새로운 공간을 예술가들에게 제공했다. 도시를 관통하는 기찻길 교각 아치 형태의 공간에 시설을 조성해 27개 작업실을 만들었다. 그전까지는 볼 수 없던 교각 공간을 활용한 시설이다 보니 유명해져 이를 보러 오는 이들도 많다. 주위 아파트 등의 임대료가 지속적으로 오르지만, 이 작업실은 주변 시세의 3분의 1에 불과하다.

이 공간에 입주한 작가들을 ‘아치 작가’라고 하는데 한국 작가들도 있다. 입주 2년이 넘은 장광범 작가는 “이시레물리노가 예술가를 위한 작업실을 마련한 것은 중요한 문화정책”이라며 “작가들도 매년 작업실을 주민에 개방하고, 그룹전을 여는 등 주민들과 소통하고 있다”고 말했다.

크뉘스만 부시장은 “주민들이 예술 등 문화를 향유하도록 하는 것이 지자체의 당연한 의무”라며 “문화를 발전시켜야 도시를 더 낫게 만들 수 있는데, 이를 위해 예술가들에 대한 지원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시레물리노=글·사진 이귀전 기자